① 정약용유적지, 다산생태공원
- ( 2022.02.15 )
오랜만에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재 정약용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을 산책하여 보았다. 답답하고 힘들 때면 나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팔당호수가 있는 정약용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으로 가게된다. 이곳에 가서 강변을 거닐며 바라보는 바다같은 넓은 팔당호수 주변의 경치는 내 마음을 아련하게 하며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나를 해방시켜 주는 해방구같은 역활을 하는 곳이다.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 이루는 넓은 호수는 바다같이 느껴진다. 북동방향의 양수리 두물머리 방향과 남동쪽의 경기 광주의 남종면 방향의 아스라한 산들, 그리고 남쪽 방향으로 바라보이는 퇴촌, 경안천 방향, 그리고 북서방향으로 하남 검단산, 용마산 능선, 팔당의 예빈산 능선, 팔당댐의 경치는 너무 아름답다. 바람이 불어 춥게 느껴지는 날씨에 찾는 사람들은 적었으나 깊어져 가는 겨울의 정치를 느끼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위대한 사상과 업적을 생각하며 평일 오후의 한때를 보낼 수 있었다. 너무 보람된 하루의 한 때 였습니다.
○ 산 책: 걸음수 5,924 steps, 거리 4.1 km, 소모열량 215Kcal, 소요시간 01:09 hrs, 속도 4.3 km/h.
○ 코 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유적지 및 다산생태공원 일원.
● 정약용유적지:
정약용유적지 주차장 (무료)
<- 실학박물관
남양주관광안내도
남양주 8경(八景):
1경: 정약용유적지, 2경: 광릉숲, 3경: 북한강 자전거길, 4경: 천마산 일출, 5경: 축령산(축령산자연휴양림)
6경: 오남호수공원, 7경: 수락산. 불암산, 8경: 미음나루, 삼패한강공원
문화의 거리
'꺼지지 않는 불', 2001, 박철우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저술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서책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2001년 11월."
경기옛길
" 상심낙사의 길을 걷다. "
마음으로 즐기는 아름다운 길
2021.10.23 - 2022.2.27
다산문화관
2012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정약용유적지 안내도
1. 문화관, 2. 기념관, 3. 문도사, 4. 정약용 선생묘, 5. 여유당(정약용 생가), 6. 서화관, 7. 주차장, 8. 천일각, 9. 기념탑, 10. 조형물(꺼지지 않는 불), 11. 거중기, 12. 실학박물관.
정약용 선생 생가, 여유당과 뒷편의 정약용선생 묘소가 있는 야산
문도사 방향
여유당 방향
다산기념관
수원화성
거중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사당인 문도사(文度祀)
문도사
다산 정약용 선생 상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
1762년 (영조38년)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생
1789년 (정조 13년) - 문과급제
1794년 (정조18년) - 성균관 직장, 경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들고, 이어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1795년 (정조19년) - 주문모 신부 사건에 형 약전의 연루로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
1801년 (순조1년) -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이후 18년의 유배 기간 고난의 세월을 보냄.
1818년 (순조 18년) - 다산 초당에서 저술을 시작함
1836년 (현종 2년) - 75세로 이곳 조안면 능내리에서 세상을 떠남.
● 다산의 사상(思想):
- 政治思想(정치사상)....임금은 백성을 위하고 (爲民思想), 군자는 자신을 바로 세운 후에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선생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지도자가 걸어야할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經濟思想(경제사상)....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을 제시하고 농업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인 여전제, 정전제를 제안,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고 조세 부담의 공평성을 기하는 등 능률적인 경제운영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 社會思想(사회사상)....폐단과 부폐로 어지러운 봉건시대에 핍박받는 민생의 편에서 사회제도를 백성을 위한 혁명적 개혁으로 주창하고 신분제 개혁, 서얼제도(庶孼制度) 철폐 등 근대적인 의미의 평등사회, 능력위주의 사회를 주장한 다산의 모습 속에서 모순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고뇌했던 참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科學思想(과학사상)....서양의 철물, 지리, 농사정책, 수리 기술, 측량법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문을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민생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실용론을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거중기, 프리즘, 종두법을 발전시키는 등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 과학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文學思想(문학사상)....진실은 삶의 맥락에서 권력에 저항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아름답습니다. 참된 지식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사회의 폐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경륜의 정신이 담긴 다산의 문학은 이 시대 문학이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 敎育思想(교육사상)....개혁은 치산(발전)을 위함인가 제산(평등)을 위함인가의 물음에 다산은 결론적으로 치산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적인 것을 연구하자는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요(經世致用)의 실학(實學)교육을 주장, 민생과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는 학문교육으로 교육의 정도(定道)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묘소 가는 길
淑夫人 豊山洪氏 文度茶山 丁若鏞先生 之 墓
(숙부인 풍산홍씨 문도다산 정약용선생 지 묘).
정약용선셍지묘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 - 광중본(壙中本)
정약용 선생이 회갑이 되던(188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채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이 있으며, 아래 명(銘)은 광중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烈水) 정약용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鏞),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 임오년(1762)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烈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정조7,1783)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13, 1789)에 갑과(甲科)의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의 공로로 시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재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에 곡산부사(谷山副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어 원옥(寃獄)을 다스렀다. 경신년(정조24, 1800) 6월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조대왕(正朝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홍씨(豊山洪氏)에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 선생(李瀷先生)의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이승훈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렸는데, 신해년(정조15, 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 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등이 서교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만 뒤에 두 형 약전(若銓) 과 약종(若鐘)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 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되었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 작처(酌處)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信)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순조10, 18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寃)으로 방축 향리(放逐 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만인 무인년(순조18, 18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가을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지 18년 동안 경전에 전심하여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및 목민(牧民). 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纂)한 것이 거의 2백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 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漿) 이 동열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포에 상사(償賜)로 받은 서적.내구마(內廐馬)문피(文被)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홍문관에 있으면서 사적을 교정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진차(珍饌) 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무릇 내부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셨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 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녀(순조22, 1822년)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 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 백천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한 뒤로 한양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敎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재학 수강(壽崗), 병조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용두, 대사헌 윤복, 관찰사 호선, 교리 언벽, 병참의 시윤이 모두 옥당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縣)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로 마쳤다. 고조의 휘는 도태, 증조의 휘는 향신, 조부의 휘는 지해인데 오직 중조께만 진사를 하였다.
홍씨(洪氏)는 6남3녀를 날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遊) 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 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금밀(近密)에 들어갔네
임금의 복심(腹心)이 되어 조석으로 모셨도다
하늘의 총애를 입어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닌다.
▶ 정약용 생가, 여유당:
다산 어록:
권학(勸學) : 끊임없이 배우고 깨쳐라
수신(修身) : 몸과 마음을 돌아보라
치가(治家) : 집안과 부모형제를 보살펴라
이재(理財) : 재물과 이익 앞에서 겸손하라
정도(正道) : 도리에 맞는 생활을 하라
위정(爲政) : 이웃의 어려움을 살펴라
용인(庸人) : 사람을 아끼고 귀히 여겨라
교우(交友) : 진심을 다해 사람을 사귀어라
'여유당 중건 상량문'((與猶堂重建上梁文) 현판.
1986년 학술원 회원이며, 유도회총본부 회장이었던 이가원(李家源) 선생이 썼다.
여유당(與猶堂):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로 집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 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으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같히 또 운명이랴 말하랴. 노자(老子)의 밀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깍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독해 낸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 두어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門梶)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아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이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실학연수', 정약용유적지 출입문.
실학연수 (實學淵數)란 실학의 모든 것이 모여있다는 뜻이다.
목민심서 (牧民心書)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 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 들이는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아니한가.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한 것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싱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 목민심서 서문, 1321년 >
거중기 (擧重機)
1792년(정조 16)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 원리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는 4.4m, 너비는 1.7m이다.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이 기계를 써서 건설 경비를 4만냥이나 절약하였고, 거중기를 이용하여 노동자 두 사람이 약 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여 위에 네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건을 달아매고, 위 도르래 양쪽으로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동시에 물레를 돌림에 따라 연결된 끈을 통해 물건이 위로 들어 올려 지도록 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하였으며 다산 선생의 과학사상과 앞선 시대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의 홍이포
홍이(紅夷)는 '붉은 오랑케' 라는 의미로, 머리털이 붉은 네델란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는 네델란드의 옛이름인 '홀랜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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