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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② 전쟁기념관- ( 2022.06.28 )

by the road of Wind. 2022. 6. 29.

 전쟁기념관

- ( 2022.06.28 )

 

전쟁기념관에 와서 여러 전쟁 무기 등 전시물과 6.25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들을 볼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잊고 지내던 전쟁에 대한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어디로 갈 것이며 정말 막막할 것 같다. 그런데, 전쟁은 순간에 일어난다. 세계사의 거의 모든 전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일어난다. 적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방심한 사이에 기습하여 한 국가를 파멸시키게 된다. 평시에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이 평화를 선전하며 사이좋게 지낼 것 같이 위장하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기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6.25전쟁도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은 전 국토를 유린하면서 마지막 낙동강 전선에서 멈췄다. 이것 마저 내 주면 그것으로 끝이다는 국군과 유엔군의 결사항전에서 주춤한 것이다. 북한군은 주력군을 이곳에 집중하면서 이를 돌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이 마지막 항전을 계속하므로서 세계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세 역전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절체절명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땅을 잃으면 그것으로 나라는 망하고, 그 날 부터 피점령지 국민들은 상상하기 싫은 현실에 내몰려 죽음의 낭떨어지에 떨어지고 만다. 세계사를 볼 때  가까운 월남이 그러 하였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지나간 지도 어연 72년이 경과하였다. 6.25 전쟁에 피흘려 싸우신 우리의 선조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그 당시에 출생한 우리 연배만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6.25와 같은 전쟁의 참상은 직접 겪어보지 못해 잘 모른다. 오늘 새벽에라도 제2의 6.25전쟁이 발발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월남 패망의 과정을 잘 보고, 그 길을 따라가지 않도록 한시라도 정신 줄을 놓으면 안될 것이다. 남북으로 갈려 대치하던 월맹과 월남, 그리고 월남 패망의 현대사는 우리의 처지와 어떻게 그렇게 대비되어 보이는가 놀랄 뿐이다.    

 

 

6.25 전쟁 연표:

 

1950. 6. 25-  북한군 남침.
1950. 6. 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1950. 8. 1  -  미 제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1950. 8. 5  -  인민군 8월 공세 시작. 
1950. 8. 16 -  B-29 폭격기 융단폭격 시작. 
1950. 8. 31~ 9. 8 -  인민군의 9월 공세.
1950. 9. 15 - 인천상륙작전.
1950. 9. 28 -  수도 서울 탈환.
1950. 10. 1 -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950. 10. 25 -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 10. 26 -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950. 11. 21 -  미 제10군단, 두만강 해산 진입
1950. 12. 15~24 -  흥남철수 단행
1951.  1.  4 -   후퇴
1951.  3.  15 -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  4.  12 -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유엔사령관 임명.
1951.  6.  23 -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  7.  10 -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951. 10. 25 -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951. 10. 28 -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951. 12. 18 -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 4. 20~26  - 부상병 포로 교환
1953. 6. 8 -  포로 송환문제 타결
1953. 6. 18 - 이승만 대통령, 전격적 반공포로 석방
1953. 7. 27 -  휴전협정 조인. 

 

 

▶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

 

K1 한국형 전차 시제품

 

63식 수륙양용 경전차

 

 

59식 전차

 

M48A5KW 패튼전차

 

 

M48A2C 패튼 전차

 

USAF

 

 

참수리 357호

 

참수리 357호정 (Patrol Killer, Medium (PKM0 357):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함에 따라 제2의 연평해전이 발생하였고, 우리 고속정은 긴급 출동하여 경고방송과 함께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차단 기동을 실시하였다. 이에 북한 경비정은 아무런 경고없이 우리 고속정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가해왔으며 우리 해군함정들은 단호하게 대응하여 북한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30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우리 해군은 북한군이 쏜 포탄 258발로 참수리 정장을 포함한 장병 6명이 선상에서 전사하고 이 고속정 참수리-357호정은 침몰되었다. 전시된 참-357호정은 국민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선체는 실물과 동일하게 1:1로 제작한 것이며, 실물은 해군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The WAR MEMORIAL of KOREA

 

 

전쟁기념관 동영상

 

 

 

 

 

▶ 전쟁기념관:

 

 

국군의 월남 등 해외 파병 23개 부대 깃발과 작전명, 주둔지, 예하부대 등이 설명된 깃발이 설치되어 있다.

 

백마부대: 
- 파병기간; 1966.9.23-1973.2.23
- 예하부대: 제28연대, 제29연대, 제30연대, 포병연대, 사단직할대
- 주둔지역 베트남 칸호아성 및 푸엔성 일대. 
- 남베트남 닌호아1.2호 작전, 나짱 백마1호 작전 
 
맹호부대: 
- 파병기간; 1965.10.22-1973.3.8
- 예하부대: 제1연대, 기갑연대, 포병연대, 사단직할대, 제26연대 (1966.4.16이후)
- 주둔지역 베트남 빈딘성 및 푸엔성 일대 
- 남베트남 송까우 오작교 작전. 

청룡부대:
- 파병기간; 1965.10.9-1972.2.7
- 예하부대: 제1.2.3연대, 포병대대, 직할대.
- 주둔지역: 베트남 깜란 (1차주둔), 뚜이호아 (2차주둔)
- 남베트남 뚜이호아 청룡1호작전. 
 

eva armisen 에바 알머슨 andando  2022. 05. 13 ~ 12. 04 

 

관람요금: 
성인 (20세 이상) :       1인 20,000원, 단체(20인) 18,000원.
청소년 (14세~19세):   1인 20,000원, 단체(20인) 18,000원
- 어린이 ( 4세~13세):    1인 13,000원, 단체(20인) 11,,000원

특별할인10,000원/ 36개월 미만 (증빙서류는 입장시 제시)
.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상이군경, 장애인, 기초수급대상자.
. 무료 및 할인 혜택은 본인에 한함. 
. 신분증/증빙서류 미지참시 혜택 적용불가.
. 중복 할인 불가.

오디오가이드:  3,000원
1. '가이드온' 앱 설치 후 '에바 알머슨 특별전: 에바 알머슨 Andando' 선택.
2. 화면 하단에 '오디오 구매' 버튼 선택
3. 결제 완료후 나의 가이드에서 전시 선택후 '다운로드' 버튼 선택.
4. 다운로드 완료후 오른쪽 하단 '오디오 가이드' 버튼 선택.

관람시간: 10:00 ~ 18:00 (입장 및 매표 마감 17:00), 월요일 휴무.
주차안내

- 전시장 출입구에 비치된 테블릿을 통해 차량 등록 후 주차장에서 정산 가능합니다.
- 요금: 3시간 4,000원.   
- 기타문의  전쟁기념관 주차관리팀 02-709-3162 

 

 

6.25 전쟁 참전국 기념비

UN을 비롯하여, 그외  21개국 참전국의 기념비가 전쟁기념관 정면 좌우측에 세워져 있다.

 

 

UN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불법 남침을 강행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대한민국에 군사원조를 결의하였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21개국에서 병력을 파견하였고, 42개국은 물자 및 재정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유엔은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용기와 참전국의 결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USA 미국:

 

미국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제일 먼저 한국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였으며, 유엔군 사령부를 지도하여 한국에 파병된 유엔참전구 부대를 통합지휘 하였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전투는 오산전투, 대전전투, 낙동강방어작전,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장진호전투, 지평리전투이다.

파병기간: 1950.6.27 ~ 1955.3.
파병부대: 8사단 극동해군, 극동공군 부대
참전인원: 1,789,000 명.
교전중 부상: 92,134명
교전 중 사망: 36,574명.

 

 

관람시간:  9:30 - 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3F: 1) 6.25전쟁실3 (UN실), 2) 기증실, 3) 해외파병실, 4) 국군발전실

2F: 1)호국추모실, 2) 6.25전쟁실1, 3) 6.25전쟁실 2, 4) 기획전시실

1F: 1)전쟁역사실1, 2) 전쟁역사실 2, 3) 대형장비실, 4) 이병형홀

B1/B2: 주차장

 

 

▶ 6.25전쟁실1:

 

1. 북한군 남침, 2 북한군 최대 남침선, 3. 유엔군 최대 북진선, 4. 중공군 최대 남침선, 5. 휴전협정조인 

----> 북한군 남침

----> 국군 유엔군의 진격 

 

 

 

01 북한의 전쟁 모의. 남한 침략 증거 문서:

러시아의 증거물:


1) 구 소련 기밀문서
- 1994년 6월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남한에 전달한 구 소련의 기밀문서 216건.
- 김일성 무력 남침 요청. 스탈린 승인. 모택동의 지원 약속 등 남침 준비과정 기록.
2)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르시쵸프 회고록
- 김일성이 1949년 스탈린을  방문하여 남침에 대한 허락과 지원을 용청한 사실을 폭로.
3) 러시아 중학교 역사 교과서 (1992년)
-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하였음을 명시함. 

북한근의 남침 명령:

 

1) 선제타격작전계획
- 1950년 5월 29일 북한군 총참모장과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작성.
- 38선 돌파후 서울을 잠령하고 남한 주력부대를 섬멸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한다 는 3단계 남한 정복 계획.
2) 정찰명령 제1호
- 1950년 6월 18일 북한 민족보위상이 각 사단에 남침 개시 전후의 정보 수집을 명령한 문서. 

 

 

02. 6.25 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비교

부간은 남한을 침공하기 위하여 소련으로 부터 전투기, 전차 등 공갹용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였다. 반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 노후장비를 인수하였으나, 단 한대의 전차. 전투기도 갖고 있지 못하여 뷱한군을 막아낼 역량이 되지 못했다. 

병력:        한국: 105,752,      북한: 198,380.
전차:        한국:  0 ,               북한: 242
곡사포:    한국:  91 ,             북한: 552
박격포:    한국:  960 ,           북한: 1,728
항공기:    한국: 22 (연습기/연락기),  북한 226 (전투기 등)
함정:        한국 71,                 북한: 110

 

 

03. 6.25전쟁 직전 국군의 상황

1) 게릴라 소탕 작전으로 인한 전력의 분산.
- 북한이 남파시킨 무장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8개 사단중 총 3개 사단이  동원되어 전방을 지킬 병력이 분산됨.

2) 대규모 군사훈련 부족
- 공비 토벌 및 38선에서  북한군의 도발에 대응하느라 각 부대가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못함.

3) 6월 24일 비상경계령 해제와  대규모 휴가
- 4월 부터 시작된 비상경걔태세가 해제되어 병력의 1/3~1/2이 노번기 휴가를 받아 전선을 이탈함.


4) 주요 지휘관들의 육군회관 개관 축하연 참석
- 6월 24일 저녁 육군 장교회관 개관 축하연에 참석하느라 6.25전쟁 발발당시 공백상태에 빠짐.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멕아더 원수, 인천 월미도 상륙작전 수행 사진

 

백척간두의 나락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세계전사에 빛나는 전략가 맥아더 원수.

이 분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나라는 존재하고 있겠는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실패할 확율이 매우 높은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도 반대하였건만

선견지명의 예리한 판단으로 결단하여 예상을 뛰어넘은 전과를 얻은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는 침략자와 수호자로 엄격히 구분된다. '새벽의 침략자' 전면엔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국군과 맥아더 원수 등 16개 참전국 지휘관들이 '자유의 수호자'로 이들과 맞서있다

자유의 수호자들:
1. 맥아더 원수, 2. 리지웨이 장군, 3. 클라크 장군, 4. 정일권 장군, 5. 이승만 대통령, 6. 트르먼 대통령, 7. 아이젠아워 대통령, 8. 신현준 장군, 9. 백선엽 장군, 10 차일혁 경무관, 11. 이종찬 장군, 12. 김정렬 장군, 13. 손원일 제독. 

새벽의 침략자들:
1. 남일, 2. 최용건, 3. 모택동, 4. 김일성, 5. 김책, 6. 팽덕회, 7. 스탈린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일으킨 전쟁:


1949년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차례 요청했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 중국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탈린도 입장을 바꾸었고, 1950년 3월 말부터 한달 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뚱의 동의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뚱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마오쩌뚱은 앞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결국 동의하고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을 약속하였다. 

"우리가 핵 개발에 성공하여 미극 내에서는 한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한국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남침을 적극 추진하기 바란다. 전쟁은 반드시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한국군이 제정신 차릴 틈을 절대 허용해선 안된다."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바 극비회담. 1950.3.30. - 당시 회의록 사본

" 남한이 수용할 수 없는 '평화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투행위를 개시하여 누가 최초로 전투행동을 시작했는지 진실을 은폐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우리가 남침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이 봉기에 참여 할 것이다."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바 극비회담. 1950.3.30.- 당시 회의록 사본.

" 스탈린 동지가 남침에 동의하면서, 최종결정은 모택동 동지와 협의를 통해 하라고 했다." 

- 출처: 모택동-김일성 북경 회담 ( 1950.5.13)- ,소련외교문서, 제3권.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암호 전문

 

1950년 5월 14일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북한의 전쟁계획에 대한 협조를 요구한 암호전문.

 

" 현 국제상황이 변하였으므로 남북한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 문제는 중국 동지와 북한 동지간에 사전 합의되어야 하며, 서로 이견을 보일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질 때 까지 미루어야 함. "

 

 

주중 소련대사  보고전문

 

1950년 5월 13일 주중 소련대사 로쉰이 북한 대표와 마오쩌뚱의 회담에 대해 보고하고, 

스탈린으로 부터 직접 설명을 듣고자 하는 마오쩌뚱의 의사를 전달한 암호전문이다.

" 김일성과 북한 외무상인 박헌영은 5월 13일에 베이징에 도착하엿음. 마오쩌뚱과의 면담에서 북한 동지들은 현재의 상황이 과거와 다르며, 북한이 활동을 개시할 수 있다는 필립포프(스탈린 가명) 동지의 지령에 관해 알려왔음. 이 계획에 대해 마오쩌뚱은 필립포프 동지로 부터 직접 설명을 요청함. " 

 

 

6.25 전쟁 초기
(전쟁발발 ~ 낙동강 방어)의 전쟁지도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고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함으써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전쟁 지도는 미국을 포함한 유엔과 한국의 대통령에 의해 수행되었다. 북한은 미군 참전 이후 최고사령관에 김일성을 임명하고 그 아래 전선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전쟁지도체제를 김일성 중심으로 강화해 나갔다.   

 

유엔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은 즉시 38도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 수 시킬 것과 회원국들은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미국의 참전 이후 유엔 회원국들의 참전 제의가 잇따라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단이 참전하게 되었으며, 유엔군 사령관에는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었다.  

 

 

* 오른쪽 낙동강 방어선 < 주요지역: 포항 -  안강 - 영천 -  다부동- 왜관 -  대구 - 고령 -  창녕 -  마산 > 

 

절체 절명의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1950년 8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역은 한국 전쟁 사상 주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투입된 유엔군 병력 14만 명이 북한군 98,000명의 마지막 침공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지속적인 공세에 계속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는데, 이 방어선은 한반도 남쪽에 구축된 140km의 방어선이었다.미군주도의 유엔군은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6주 동안 막아냈다. 주요 전투는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8월과 9월 사이, 북한군의 대공세가 2차례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하여 두 공세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북한군은 보급품 부족과 병력의 손실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반격할 시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반해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 장비 등을 압도적으로 보유할 수 있었고, 전투 동안 해군과 공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6주 후 북한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완전히 궤멸당했다. 이 전투로 인해 북한군의 보급로가 일시적으로 차단되면서 북한군은 낙동강 지역에서 공세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6.25 전쟁 중기
( 인천상륙작전 ~ 재반격)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 사령관의 직전지도 아래 전쟁을 수행하였다. 북한은 중공군 개입 이후 소련의 동의를 얻은 후 조중연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쟁지도체제를 일원화하였다. 즉 모스크바와 베이징(북경)으로부터 전략지시를 받은 조중연합사령관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기존의 명령 계통을 통해 전쟁을 지도하였다. 

국군 단독으로 38도선 돌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뷱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9월 29일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38선을 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을 불러 독자적인 38선 돌파를 지시했다. 10월 1일 한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 사령부는 10월 2일 일반명령 2호로 북진을 승인했다.    

 

 

 

인천상륙작전 지원 경로:


1.인천 <-  2. 포인트캘리포니아 <-  3. 포인트아칸시스 ( <- 부산 ( 미 제5해병연대)    <-  4.포인트아이오와  ( <- 일본 사세호 (기함, 호위함정 및 함포사격지원대)   / <- 일본 고오베 (미 제1해병사단)  / <- 일본 요코하마 (미 제7보병사단

 

 

 

인천상륙작전,

 

완벽한 기습작전의 성공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30분, 미 제5해병대 1개 대대가 녹색해안 (월미도)를 점령하였다. 오후 5시 33분, 다시 만조가 되면서 유엔의 엄호사격과 함께 주력부대들이 상륙을 시작하였다.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적색해안(현재 동구 만석동 대한재분 입구)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남구 용현5동 해안도로 입구)을 향해 상륙 돌격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15일 오후 8시 무렵,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시가지에 남은 적을 소탕하고 외곽 경비를 담당하였다.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은 9월 17일 부터 상륙을 시작해 수원. 오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탈환의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고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6.25 전쟁 후기
( 휴전협상 ~  정전)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도하에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회담에 반대함으로써 갈등이 있었다. 공산군측은 스탈린 사망 이후 조중연합사 체제에 의한 작전지도는 계속되었으나, 소련의 영향력이 감소됨으로써 이후 휴전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지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반공포로 27,000명 석방은 미국과의 협의 없이 이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루어져 세계를 놀라게 했다.      

 

 

 

휴전회담 중의 주요 전투지역 (1951. 6. 23 ~ 1953. 7. 27 )



(개성) - 네바다 전초( Nevada Cities) - 후크 고지 (The Hook)- 빅 혼 고지(Big&Liyyle Hill) - 불모 고지 (Old Baldy)-  폭찹 고지 (Porkchop Hill)- 티본 고지(T-Bone) - 백마 고지 (White Horse Hill ) - (철원) - 잭슨 고지(Jackson Heights) - 철의 삼각지(Triangle Hill) - 러셀 고지 (Jane Russel Hill)- 번개 고지 (Lightening Hill) - (금화) - 수도 고지 ( Capital Hill ) -  단장의 능선 ( Heart Break Ridge) - 펀치볼(Punch Bowl) - 제이 능선(J Ridge)  - 앵커 고지 (Anchor Hill)

 

 

 

한국측 서명없는 정전협정 조인서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과 미국간에 체결된 조약 문서이다. 이 조약은 1954년 1월 양국의 국회에서 승인되어 비준절차를 거쳐 11월 17일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정식 발효되었다.  

 

 

 

평양환영대회


1950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 같은 달 30일 평양시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입성 환영대회가 열렸다. 당시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작가 신중섭. 

 

 

맥아더 장군 과 이승만 대통령

 

 

전쟁기념관 2F

 

 

서울 탈환 후 태극기 게양

 

1950. 9. 15일에 실시된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한국군과 UN군은 인천 진입에 성공했고 곧바로 주둔 중이던 북한군을 소탕하여 나가, 인천은 상륙 다음날인 16일 아침에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 후 9월 18일부터 28일까지 한국해병대, 국군 제17연대, 미 제1해병사단, 그리고 미 제7사단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파해 나간 후, 인천 상륙에 성공한 후 13일만에, 서울이 함락된지 3개월만에 드디어 서울 수복에 성공하였다. 1950. 9. 27일 새벽 3시, 한국해병대 제6중대 1소대는 중앙청에 진입하여 당시 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양병수 2등 병, 최국방 견습수병 등과 함께 중앙청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감격적인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B-29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킨 USAF B-29

 

6월 28일부터 B-29폭격기 4대가 괌에서 출격하여 공중작전에 참가하였다. B-29는 의정부-서울, 개성-서울을 잇는 도로상의 북한군을 맹폭격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작전에서는 왜관 일대에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북한군에게 많은 타격을 가하였다.  

 

 

전쟁 속의 피닌민들 

 

 

미국을 위시한 우방국의 지원과 피 흘려 지켜낸 국군장병 등 

6.25 전쟁에서 피흘린 구국의 용사들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한 마음이 우러난.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 애국가.

 

  

시계탑

1950. 6. 25  4:55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 6.25 노래

 

 

▶ 삼각지, 대구탕 골목 :

 

'대구탕 골목'

이 골목에는 대구탕 집이 3곳 있는데 모든 집이 사람이 많다. 

오늘 용산에서 시위한 듯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대구탕에 소주 한잔씩 하고 있다

이곳 용산  삼각지에 왔다가 대구탕 먹지 않고 가면 그 날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참 원조 대구탕 ( 02-797-3555)  

참 원조 대구탕 ( 02-797-3555 /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62길 3 ( 한강로 1가 146)

 

모든 대구탕 집이 분비지만 이곳에  앉을 만한 자리가 보여 여기에서 저녁을 먹으려 하였다.

대구탕은 그 맛이 거기가 거기다. 비슷한 것 같다. 모두 시원하고 맛 있는 것 같다.

 

 

대구얼큰탕 1인분 (12,000원)

 

 

메뉴: 

 

대구얼큰탕 12,000, 대구맑은탕 12,000,  아구찜 소 33,000, 중 44,000, 대 55,000,

대구볼찜 소 33,000, 중 44,000, 대 55,000, 대구튀김 15,000,  소.맥주 5,000, 야채 추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