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전쟁기념관
- ( 2023.06.29 )
거의 1년만에 용산 전쟁기념관을 가보았습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장마비가 뿌리며, 중부 지방도 호우주의보까지 발령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다보니 비가 소강 상태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은 시간 전철을 타고 6호선 삼각지역에 내려 약간의 비가 오는 중에 전쟁기념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엇그제가 피비린내 나는 6.25 전쟁 발발 ( 1950.6.25 새벽 04시 ) 73주년 되는 날입니다.
용산 전쟁기념관은 건물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전투기, 탱크, 야포, 미사일 등 전쟁 무기들이 볼만 합니다. 또한 연못에 설치된 참수리 357호의 수많은 총탄 흔적들에서 휴전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6.25 전쟁 같은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방법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일 것입니다. 강력하고 압도적인 국방력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온 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오는 날에도 국방부 앞 도로변에서는 확성기를 틀어놓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노래 가락을 계속 틀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일하는 국방부에서 국토방위 업무에 여념이 없을 군인들이 얼마나 소음으로 인해 괴로울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쟁 콘트롤 타워 주변에서는 일체 시위를 할 수 없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과 대치하는 휴전 상태의 국가에서 이런 정신없는 사람들은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하여 오늘날 부강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피 흘려 지켜낸 나라에서 호국 영령들이 편히 잠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쟁기념관 관람안내:
- 관람시간: 09:30 ~ 18:00 (입장마감 17:00, 폐관시작 17:40)
-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포함된 연휴때는 연휴 다음날 휴관)
- 관람요금: 무료 (일부 특별기획전 별도)
※ 주차요금:
* 주차료 할인대상 차량의 경우 사전 무인정산기 이용 권장.
* 카드전용 (현금정산 불가)
* 설치위치: 지하주차장 (1층, 2층) 승강기 입구/ 대형버스주차장 (카페 라스베이글 건물) 앞/
* 지상주차장 (소형 대형) / 지하주차장 (1층 2층)
* 제한높이 2,2m
1. 일반권:
- 소형 (일반, 관람차량): 기본 2시간 이내 4,000원, 초과시 30분당 1,500원.
- 대형 (일반, 관람 ) : 기본 2시간 이내 12,,000원, 초과시 30분당 4,000원.
2. 할인:
※ 주차료의 50% 할인 대상자 (정기권, 일일권 할인 제외):
- 장애인 : 복지카드 소지자(본인 탑승시 적용)
- 경차 : 1,000cc 이하
- 저공해 1,2종 차량(전기, 수소, 하이브리드)
* 전기차 충전 시 주차요금 동일 적용
- 다둥이(2자녀 이상) 행복카드 소지자
※ 유료 특별전(대관) 관람:
- 소형 (일반, 관람차량): 기본 3시간 이내 4,000원, 초과 30분당 1,500원.
- 대형 (일반, 관람): 기본 3시간 이내 12,,000원, 초과 30분당 4,000원.
* 유료특별전(대관) 관람 (1시간 할인 적용)
3. 정기권:
- 소형 일반차량 1개월: 150,000원
- 대형 일반차량 1개월: 300,000원
* 매일 1일 부터 말일까지 (일할계산 불가)
4.일일주차: 입차시간 부터 24시간 이내:
- 소형: 3만원, - 대형: 6만원.
* 입차후 30분 이내 무료.
기념관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 (용산동1가 8번지)
주차관리: 02-709-3162 / 3163.
나는 가능한한 빠르게 전쟁기념관 외부의 무기들을 구경하여 본 후 전쟁기념관 관람 시간이 종료되어 다시 삼각지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삼각지역 13번 출구 앞에는 그 유명한 삼각지 대구탕 골목이 있는데, 비오는 날 대구탕 (1인분 14,000원)에 소주 (5,000원) 한잔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러니 꿩 대신 닭이라고 5호선 둔촌역 3번 출구 앞 둔촌시장에 입구에 있는 만원 족발집에서 족발 한 팩 ( 현찰의 경우 1만원 )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시원한 맥주에 갈증을 달랬습니다.
▶ 산 책 : 걸음수 3,894 steps, 거리 2.8 km, 소모열량 132 kcal, 소요시간 00:41 hrs, 속도 4.0 km/h, 기온 23℃ (비).
▶ 코 스 : 용산 전쟁기념관 일원.
삼각지역 12번 출구
전쟁기념관 입구
'형제의 상'...
두동강 난 국토 위에서 서로 적이 되어 싸우다 만난 어느 형제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쟁기념관 안내판
전쟁기념관 안내
1. 전시실 입구, 2. 전시실, 3. 어린이박물관, 4. 야외전시장, 5. 참수리호(357호정), 6. 전사자명비 (회랑), 7. 평화의 광장, 8. 6.25전쟁 참전국 기념비, 9. 광개토대왕릉비, 10. 평화의 종, 11. 6.25 상징조형물, 12. 형제의 상, 13. 평화의 시계탑, 14. 뮤지엄카페, 15. 조형물 "비싱", 16. 뮤지엄웨딩홀.
기타: 승용차주차장, 버스주차장, 식당, 매점, 수유실, 안내소, 카페, 장애인경사로, 현금지급기, 보관함/뮤실물센터, 유모차/휠체어 무료대여, 기념품점, 지하철타는 곳, 버스 타는 곳.
전쟁기념관 시계탑....1950. 6. 25 05:04분에 멈춰서 있다.
전쟁기념관 연못
전쟁기념관 서관
▶ 6.25 전쟁 연표:
1950. 6. 25 - 북한군 남침.
1950. 6. 26 -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1950. 8. 1 - 미 제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1950. 8. 5 - 인민군 8월 공세 시작.
1950. 8. 16 - B-29 폭격기 융단폭격 시작.
1950. 8. 31~ 9. 8 - 인민군의 9월 공세.
1950. 9. 15 - 인천상륙작전.
1950. 9. 28 - 수도 서울 탈환.
1950. 10. 1 -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950. 10. 25 -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 10. 26 -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950. 11. 21 - 미 제10군단, 두만강 해산 진입
1950. 12. 15~24 - 흥남철수 단행
1951. 1. 4 - 후퇴
1951. 3. 15 -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 4. 12 -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유엔사령관 임명.
1951. 6. 23 -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 7. 10 -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951. 10. 25 -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951. 10. 28 -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951. 12. 18 -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 4. 20~26 - 부상병 포로 교환
1953. 6. 8 - 포로 송환문제 타결
1953. 6. 18 - 이승만 대통령, 전격적 반공포로 석방
1953. 7. 27 - 휴전협정 조인.
용산 전쟁기념관 동영상
형제의 상
형제의 상:
6.25 전쟁 당시 각각 한국군과 인민군이 되어 적으로 만나게 된 형제의 비극을 작품으로 재현한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인 박규철 소위는 한국군 제8사단 16연대 소속으로, 동생인 박용철 하전사는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 소속으로 참전하게 되엇다.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만난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겨눈 총을 거두고 얼싸안았다. '동족 상잔의 비극'이라는 6.25전쟁의 성격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안고있는 형제의 모습에서 화해, 사랑, 용서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하구의 반구형 돔은 전국에서 수집한 화강석 조각을 고분처럼 쌓아 올린 것으로 수많은 순국선열의 희생을 상징한다. 동,서쪽으로 갈라진 돔이 위로 올라갈 수록 아물어지는 형태는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어 통일이 되길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돔의 내부에는 한민족의 정신과 국난 극복을 주제로 한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갈라진 틈을 메우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 슬픔과 환희를 표현한 것이다. 천장에는 통일된 한민족의 결속을 상징하는 서로 연결된 여러개의 쇠줄이, 바닥에는 당시 전투부대를 파병한 유엔 16개국의 지도 조형판이 설치되어있다.
전쟁기념 조형물
모과나무
6.25 전쟁조형물 Korean War Monuments:
-6.25 탑:
청동검과 생명나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청동검은 유구한 역사와 상무정신을 표현하고 생명수는 한민족의 화평과 번영을 상징함.
-석그릇:
6.25탑을 받치는 그릇모양의 기단부로 겨레의 정신과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아가는 그릇을 의미함.
-호국군상:
전쟁을 극복했던 각게각층의 38인을 조각하여 6.25전쟁의 고난과 고통의 상처를 표현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호국정신을 상징함.
-석벽: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인 한반도를 뜻하며 선사시대 바위그림을 재구성하여 민족의 번영과 풍요를 기원함.
-참전국 기념비:
참전 21개국의 상징물을 조각하여 세움으로 참전국 전사상자를 추모함.
서시
여기 맥맥히 흐르는 숭엄한 겨레의 숨결과 거룩한 호국의
발자취 살아 있어 경모의 정 뜨겁게 솟구치리
한핏줄 이어온 자존과 삶의 터전 지킨 영웅들 위훈으로
이 하늘 이 땅에 해와 달 고이 빛났어라
침략 물리친 선열의 얼 좇아 불뿜는 조국애 드넓게 펼치어
자랑스러운 민족사 영원토록 보전하리
지은이 박경석.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동관 & 참수리 357호
참수리호 357....
총탄 흔적이 선명하다.
각종 전차들...
USAF...B52 폭격기의 위용
B-52D 폭격기 (스트라토포트레스):
미국 보잉(Boeing)사가 핵폭격기로 개발해 1955년에 배치된 장거리 아음속(음속 이하) 제트 전략 폭격기이다. 이후 기체를 개조해 108발의 재래식 폭탄을 탑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웅단 폭격이 가능해 졌다.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라인베이커2 작전에서는 1만 5,000여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후방의 4연장 기관총으로 MG-21 3대를 격추시키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B-52는 A~H형(8종)으로 구분되며, 총 744대가 생산되었다. A~F형은 지금까지 모두 퇴역했지만, H형은 1961년 부터 생산된 102대 중 현재 70여대가 여전히 운용되고 있다.
길이 x폭x높이: 47.7M x 56.4M x 14.7M.
중량: 83,250jg
엔진: Pratt & Whitney J57-p-19W x 8대.
성능: 최대속도 1,027km/h, 순항속도 847 km/h, 항속거리 6,120km, 상승한도 14,082m
무장: 기관총 12.7mm X 4정, 각종포탄 27,215kg
<- 170M 전쟁기념관 어린이 박물관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
414년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374~413, 재위 391~4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394-491,재위 413~491)이 세운 비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에 세워진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설화 등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적혀있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을 여러차례 격파했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1면 9행의 신묘년조(辛卯年條)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본부설의 근거로 잘못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비석은 자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되는 유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잘 못 된 것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광개토대왕릉비
번역문 1면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런 ...이었다. ㅁㅁㅁㅁㅁ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딸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 라고 하었다. 말이 끝나자 마자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 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았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태왕(太王)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릴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각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 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어갔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 5년 을미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사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ㅁ성(ㅁ城)․역성(力城)․북풍(北豊, 오비ㅁ(五備ㅁ)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 (중략)...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 군이 ㅁㅁㅁ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ㅁㅁ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ㅁ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ㅁ리성, 잠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ㅁㅁㅁ성, ㅁ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ㅁㅁ성, 두노성, ㅁㅁㅁ
광개토대왕릉비
번역문 2면
리성․미추성․야리성․태산한성․소가성․돈발성․ ㅁㅁㅁ성․루매성․산나성․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ㅁ성․임성․ㅁㅁㅁㅁㅁㅁㅁ리성․취추성․ㅁ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성․증ㅁ성․ㅁㅁ노성․구천성․...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 (398년)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息愼,肅愼) 토곡(土谷)을 관찰, 순하였으며 그 때에 (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ㅁ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후로(백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 9년(399년) 기해(己亥)에 배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해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老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新羅城: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守兵)...신라성 ㅁ성...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알 수 없음)
광개토대왕릉비
번역문 3면
ㅁㅁㅁㅁ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 (404년) 삽진(甲辰)에 왜(倭)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을 합쳐 도합 5만명을 퍄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 루성․ ㅁ주성․ ㅁ성, ㅁㅁㅁㅁㅁㅁ성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영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 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ㅁㅁㅁ압로이였다. 무릇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 연호(烟戶) (의 그 출신지와 호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勾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平穰城) 민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련의 2가는 간연. 배루인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 2가는 간연. 양성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해 온 한(韓)과 예(穢) (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1가는 국연,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조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견고성(莫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의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저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광개토대왕릉비
번역문 4면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模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전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三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계실 때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맞게 하였는데, 나는 구민(舊民)들이 점점 몰ㅇ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모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韓人) 예인(穢人) 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구 수묘호를 합쳐, 국연이 30가이고 간연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잇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국 평화의 종
2013년 정전60주년 기념한 조형물이다.
" 분수대 원형에 새겨진 얼굴상은 전쟁기념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을 촬영하여 조각한 작품임. "
남산 & 서울N타워가 조망된다
정말 큰 전투기이다. 상상을 초월한다.
T-37C 훈련기(트위트)
C-46 수송기 (코만도)
C-119G 수송기 (플라잉 박스카)
C-123J 수송기 (프로바이더)
부활호
MIG-19 전투기(파머)
F-860 전투기 (세이버독)
MGM-52 미사일(랜스)
MK,4 L/60 40mm 4연장 함포
S-2 트래커 해상 초계기
MK.50 5인치 로켓발사기
MK.4 20mm 대공포
MK.20 20mm 2연장 대공포
MIM-14 미사일 (나이키 허클리스)
홍상어 대잠미사일 & 한국형 수직발사장치 (KVLS)
천마 지대공 유도탄(K-SAM)
K200 한국형 보병전투장갑차
LVTP-7 상륙장갑차
KM900 차륜형 장갑차
M113A1 장갑차
M107 175mm 자주평사포
M56 스콜피온 자주포
M59 155mm 평사포
M157 벌컨 대공포
59식 전차
M47 패튼 전차
M48A5KW 패튼 전차
처참한 총탄의 흔적이 교전의 엄청난 긴박한 상황을 느끼게 하며, 이 때의 적의 흉탄에 고귀한 목숨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젊은 용사들이 너무 안타깝고,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들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에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느끼게 된다. 매년 6월의 보훈의 달에는 6.25 전쟁일 10시쯤에 전국적으로 싸이렌을 울리며 모든 국민들이 묵념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조국을 위해 몸 바친 호국영령들에 대한 감사의 념을 표하며, 조국 수호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측면에서 매우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참수리 357호
참수리 357호정 (Patrol Killer, Medium (PKM0 357):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함에 따라 제2의 연평해전이 발생하였고, 우리 고속정은 긴급 출동하여 경고방송과 함께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차단 기동을 실시하였다. 이에 북한 경비정은 아무런 경고없이 우리 고속정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가해왔으며 우리 해군함정들은 단호하게 대응하여 북한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30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우리 해군은 북한군이 쏜 포탄 258발로 참수리 정장을 포함한 장병 6명이 선상에서 전사하고 이 고속정 참수리-357호정은 침몰되었다. 전시된 참-357호정은 국민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선체는 실물과 동일하게 1:1로 제작한 것이며, 실물은 해군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 후기: 내가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여 참수리 357호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헸는데, 제2연평해전이 21년전 바로 오늘 일어난 전투임을 알았다. 신문 기사의 사진에서 어느 노모 등 유가족들이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아들들의 얼굴 부조를 쓰다듬으며 눈물 흘리는 모습들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왔다. 금쪽같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흘린 뜨거운 피의 가치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SP-10 반잠수정
UN: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불법 남침을 강행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대한민국에 군사원조를 결의하였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21개국에서 병력을 파견하였고, 42개국은 물자 및 재정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유엔은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용기와 참전국의 결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USA 미국:
미국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제일 먼저 한국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였으며, 유엔군 사령부를 지도하여 한국에 파병된 유엔참전국 부대를 통합지휘 하였다. 전쟁동안 수행한 주요전투는 오산전투, 대전전투, 낙동강방어작전,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장진호전투, 지평리전투이다.
파병기간: 1950.6.27 ~ 1955.3.
파병부대: 8사단 극동해군, 극동공군 부대
참전인원: 1,789,000 명.
교전중 부상: 92,134명
교전 중 사망: 36,574명.
== < ▼ 2022.6.28 전쟁기념관 사진 start > ==
관람시간: 9:30 - 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3F: 1) 6.25전쟁실3 (UN실), 2) 기증실, 3) 해외파병실, 4) 국군발전실
2F: 1)호국추모실, 2) 6.25전쟁실1, 3) 6.25전쟁실 2, 4) 기획전시실
1F: 1)전쟁역사실1, 2) 전쟁역사실 2, 3) 대형장비실, 4) 이병형홀
B1/B2: 주차장
▶ 6.25전쟁실1:
1. 북한군 남침, 2 북한군 최대 남침선, 3. 유엔군 최대 북진선, 4. 중공군 최대 남침선, 5. 휴전협정조인
----> 북한군 남침
----> 국군 유엔군의 진격
01 북한의 전쟁 모의. 남한 침략 증거 문서:
러시아의 증거물:
1) 구 소련 기밀문서
- 1994년 6월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남한에 전달한 구 소련의 기밀문서 216건.
- 김일성 무력 남침 요청. 스탈린 승인. 모택동의 지원 약속 등 남침 준비과정 기록.
2)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르시쵸프 회고록
- 김일성이 1949년 스탈린을 방문하여 남침에 대한 허락과 지원을 용청한 사실을 폭로.
3) 러시아 중학교 역사 교과서 (1992년)
-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하였음을 명시함.
북한군의 남침 명령:
1) 선제타격작전계획
- 1950년 5월 29일 북한군 총참모장과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작성.
- 38선 돌파후 서울을 잠령하고 남한 주력부대를 섬멸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한다 는 3단계 남한 정복 계획.
2) 정찰명령 제1호
- 1950년 6월 18일 북한 민족보위상이 각 사단에 남침 개시 전후의 정보 수집을 명령한 문서.
02. 6.25 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비교
부간은 남한을 침공하기 위하여 소련으로 부터 전투기, 전차 등 공갹용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였다. 반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 노후장비를 인수하였으나, 단 한대의 전차. 전투기도 갖고 있지 못하여 뷱한군을 막아낼 역량이 되지 못했다.
병력: 한국: 105,752, 북한: 198,380.
전차: 한국: 0 , 북한: 242
곡사포: 한국: 91 , 북한: 552
박격포: 한국: 960 , 북한: 1,728
항공기: 한국: 22 (연습기/연락기), 북한 226 (전투기 등)
함정: 한국 71, 북한: 110
03. 6.25전쟁 직전 국군의 상황
1) 게릴라 소탕 작전으로 인한 전력의 분산.
- 북한이 남파시킨 무장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8개 사단중 총 3개 사단이 동원되어 전방을 지킬 병력이 분산됨.
2) 대규모 군사훈련 부족
- 공비 토벌 및 38선에서 북한군의 도발에 대응하느라 각 부대가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못함.
3) 6월 24일 비상경계령 해제와 대규모 휴가
- 4월 부터 시작된 비상경걔태세가 해제되어 병력의 1/3~1/2이 노번기 휴가를 받아 전선을 이탈함.
4) 주요 지휘관들의 육군회관 개관 축하연 참석
- 6월 24일 저녁 육군 장교회관 개관 축하연에 참석하느라 6.25전쟁 발발당시 공백상태에 빠짐.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멕아더 원수, 인천 월미도 상륙작전 수행 사진
백척간두의 나락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세계전사에 빛나는 전략가 맥아더 원수. 이 분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나라는 존재하고 있겠는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실패할 확율이 매우 높은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도 반대하였건만 선견지명의 예리한 판단으로 결단하여 예상을 뛰어넘은 전과를 얻은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는 침략자와 수호자로 엄격히 구분된다. '새벽의 침략자' 전면엔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국군과 맥아더 원수 등 16개 참전국 지휘관들이 '자유의 수호자'로 이들과 맞서있다.
자유의 수호자들:
1. 맥아더 원수, 2. 리지웨이 장군, 3. 클라크 장군, 4. 정일권 장군, 5. 이승만 대통령, 6. 트르먼 대통령, 7. 아이젠아워 대통령, 8. 신현준 장군, 9. 백선엽 장군, 10 차일혁 경무관, 11. 이종찬 장군, 12. 김정렬 장군, 13. 손원일 제독.
새벽의 침략자들:
1. 남일, 2. 최용건, 3. 모택동, 4. 김일성, 5. 김책, 6. 팽덕회, 7. 스탈린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일으킨 전쟁:
1949년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차례 요청했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 중국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탈린도 입장을 바꾸었고, 1950년 3월 말부터 한달 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뚱의 동의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뚱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마오쩌뚱은 앞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결국 동의하고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을 약속하였다.
"우리가 핵 개발에 성공하여 미극 내에서는 한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한국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남침을 적극 추진하기 바란다. 전쟁은 반드시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한국군이 제정신 차릴 틈을 절대 허용해선 안된다."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바 극비회담. 1950.3.30. - 당시 회의록 사본.
" 남한이 수용할 수 없는 '평화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투행위를 개시하여 누가 최초로 전투행동을 시작했는지 진실을 은폐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우리가 남침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이 봉기에 참여 할 것이다."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바 극비회담. 1950.3.30.- 당시 회의록 사본.
" 스탈린 동지가 남침에 동의하면서, 최종결정은 모택동 동지와 협의를 통해 하라고 했다."
- 출처: 모택동-김일성 북경 회담 ( 1950.5.13)- ,소련외교문서, 제3권.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암호 전문
1950년 5월 14일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북한의 전쟁계획에 대한 협조를 요구한 암호전문.
" 현 국제상황이 변하였으므로 남북한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 문제는 중국 동지와 북한 동지간에 사전 합의되어야 하며, 서로 이견을 보일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질 때 까지 미루어야 함. "
주중 소련대사 보고전문
1950년 5월 13일 주중 소련대사 로쉰이 북한 대표와 마오쩌뚱의 회담에 대해 보고하고, 스탈린으로 부터 직접 설명을 듣고자 하는 마오쩌뚱의 의사를 전달한 암호전문이다.
" 김일성과 북한 외무상인 박헌영은 5월 13일에 베이징에 도착하엿음. 마오쩌뚱과의 면담에서 북한 동지들은 현재의 상황이 과거와 다르며, 북한이 활동을 개시할 수 있다는 필립포프(스탈린 가명) 동지의 지령에 관해 알려왔음. 이 계획에 대해 마오쩌뚱은 필립포프 동지로 부터 직접 설명을 요청함. "
6.25 전쟁 초기
(전쟁발발 ~ 낙동강 방어)의 전쟁지도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고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함으써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전쟁 지도는 미국을 포함한 유엔과 한국의 대통령에 의해 수행되었다. 북한은 미군 참전 이후 최고사령관에 김일성을 임명하고 그 아래 전선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전쟁지도체제를 김일성 중심으로 강화해 나갔다.
유엔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은 즉시 38도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 수 시킬 것과 회원국들은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미국의 참전 이후 유엔 회원국들의 참전 제의가 잇따라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단이 참전하게 되었으며, 유엔군 사령관에는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었다.
* 오른쪽 낙동강 방어선: < 주요지역: 포항 - 안강 - 영천 - 다부동- 왜관 - 대구 - 고령 - 창녕 - 마산 >
절체 절명의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1950년 8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역은 한국 전쟁 사상 주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투입된 유엔군 병력 14만 명이 북한군 98,000명의 마지막 침공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지속적인 공세에 계속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는데, 이 방어선은 한반도 남쪽에 구축된 140km의 방어선이었다.미군주도의 유엔군은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6주 동안 막아냈다. 주요 전투는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8월과 9월 사이, 북한군의 대공세가 2차례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하여 두 공세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북한군은 보급품 부족과 병력의 손실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반격할 시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반해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 장비 등을 압도적으로 보유할 수 있었고, 전투 동안 해군과 공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6주 후 북한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완전히 궤멸당했다. 이 전투로 인해 북한군의 보급로가 일시적으로 차단되면서 북한군은 낙동강 지역에서 공세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6.25 전쟁 중기
( 인천상륙작전 ~ 재반격)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 사령관의 직전지도 아래 전쟁을 수행하였다. 북한은 중공군 개입 이후 소련의 동의를 얻은 후 조중연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쟁지도체제를 일원화하였다. 즉 모스크바와 베이징(북경)으로부터 전략지시를 받은 조중연합사령관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기존의 명령 계통을 통해 전쟁을 지도하였다.
국군 단독으로 38도선 돌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뷱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9월 29일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38선을 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을 불러 독자적인 38선 돌파를 지시했다. 10월 1일 한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 사령부는 10월 2일 일반명령 2호로 북진을 승인했다.
인천상륙작전 지원 경로:
1.인천 <- 2. 포인트캘리포니아 <- 3. 포인트아칸시스 ( <- 부산 ( 미 제5해병연대) <- 4.포인트아이오와 ( <- 일본 사세호 (기함, 호위함정 및 함포사격지원대) / <- 일본 고오베 (미 제1해병사단) / <- 일본 요코하마 (미 제7보병사단)
인천상륙작전, 완벽한 기습작전의 성공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30분, 미 제5해병대 1개 대대가 녹색해안 (월미도)를 점령하였다. 오후 5시 33분, 다시 만조가 되면서 유엔의 엄호사격과 함께 주력부대들이 상륙을 시작하였다.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적색해안(현재 동구 만석동 대한재분 입구)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남구 용현5동 해안도로 입구)을 향해 상륙 돌격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15일 오후 8시 무렵,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시가지에 남은 적을 소탕하고 외곽 경비를 담당하였다.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은 9월 17일 부터 상륙을 시작해 수원. 오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탈환의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고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6.25 전쟁 후기
( 휴전협상 ~ 정전)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도하에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회담에 반대함으로써 갈등이 있었다. 공산군측은 스탈린 사망 이후 조중연합사 체제에 의한 작전지도는 계속되었으나, 소련의 영향력이 감소됨으로써 이후 휴전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지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반공포로 27,000명 석방은 미국과의 협의 없이 이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루어져 세계를 놀라게 했다.
휴전회담 중의 주요 전투지역 (1951. 6. 23 ~ 1953. 7. 27 )
(개성) - 네바다 전초( Nevada Cities) - 후크 고지 (The Hook)- 빅 혼 고지(Big&Liyyle Hill) - 불모 고지 (Old Baldy)- 폭찹 고지 (Porkchop Hill)- 티본 고지(T-Bone) - 백마 고지 (White Horse Hill ) - (철원) - 잭슨 고지(Jackson Heights) - 철의 삼각지(Triangle Hill) - 러셀 고지 (Jane Russel Hill)- 번개 고지 (Lightening Hill) - (금화) - 수도 고지 ( Capital Hill ) - 단장의 능선 ( Heart Break Ridge) - 펀치볼(Punch Bowl) - 제이 능선(J Ridge) - 앵커 고지 (Anchor Hill)
한국측 서명없는 정전협정 조인서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과 미국간에 체결된 조약 문서이다. 이 조약은 1954년 1월 양국의 국회에서 승인되어 비준절차를 거쳐 11월 17일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정식 발효되었다.
평양환영대회
1950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 같은 달 30일 평양시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입성 환영대회가 열렸다. 당시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작가 신중섭.
맥아더 장군 과 이승만 대통령
전쟁기념관 2F
서울 탈환 후 태극기 게양
1950. 9. 15일에 실시된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한국군과 UN군은 인천 진입에 성공했고 곧바로 주둔 중이던 북한군을 소탕하여 나가, 인천은 상륙 다음날인 16일 아침에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 후 9월 18일부터 28일까지 한국해병대, 국군 제17연대, 미 제1해병사단, 그리고 미 제7사단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파해 나간 후, 인천 상륙에 성공한 후 13일만에, 서울이 함락된지 3개월만에 드디어 서울 수복에 성공하였다. 1950. 9. 27일 새벽 3시, 한국해병대 제6중대 1소대는 중앙청에 진입하여 당시 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양병수 2등 병, 최국방 견습수병 등과 함께 중앙청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감격적인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B-29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킨 USAF B-29
6월 28일부터 B-29폭격기 4대가 괌에서 출격하여 공중작전에 참가하였다. B-29는 의정부-서울, 개성-서울을 잇는 도로상의 북한군을 맹폭격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작전에서는 왜관 일대에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북한군에게 많은 타격을 가하였다.
전쟁 속의 피닌민들
== < ▲ 2022.6.28 전쟁기념관 사진 end > ==
6.25 전쟁 결과:
6.25전쟁에서 우리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전쟁피해를 입었다. 군사작전으로 인한 1차적 전쟁피해와 이념투쟁에 의한 2차적 피해가 중첩되었으며,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 살상무기가 좁은 전장에 동원됨으로써 살상력을 더하였다.
인명피해에 있어, 한국군(경찰 포함) 63만 명, 유엔군 15만 명을 포함 78만 명이 전사·전상·실종되었고, 북한군 80만 명, 중공군 123만 명 등 약 203만 명의 손실이 생겨 군인피해만도 총 281만 명에 달하였다.
물적 피해도 인명피해 못지않게 컸다.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다.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되었고,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의 60%가 파괴되었다. 이런 가운데 개인의 가옥과 재산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을 비롯해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음은 물론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및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활의 터전과 사회·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화되었다.
휴전(Armistice)은 종전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가교였고, 이에 따라 휴전으로 일단 정전(Cease-fire) 조치를 취하고 휴전체제를 구축한 다음 이를 평화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즉,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평화적 해결방안과 외국군의 철군 등 정치현안을 다루기로 협정하였다. 쌍방은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거나 남북통일로 승화시키는데 실패하고 불안한 휴전상태로 대치를 계속하게 되었다.
6.25전쟁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전쟁의 억지(抑止)는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만이 가능하며 한반도 통일도 평화적인 수단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 < 국가기록원, 6.25 전쟁 기술 중 >
국군의 월남 등 해외 파병 23개 부대 깃발과 작전명, 주둔지, 예하부대 등이 설명된 깃발이 설치되어 있다.
백마부대:
- 파병기간; 1966.9.23-1973.2.23
- 예하부대: 제28연대, 제29연대, 제30연대, 포병연대, 사단직할대
- 주둔지역 베트남 칸호아성 및 푸엔성 일대.
- 남베트남 닌호아1.2호 작전, 나짱 백마1호 작전
맹호부대:
- 파병기간; 1965.10.22-1973.3.8
- 예하부대: 제1연대, 기갑연대, 포병연대, 사단직할대, 제26연대 (1966.4.16이후)
- 주둔지역 베트남 빈딘성 및 푸엔성 일대
- 남베트남 송까우 오작교 작전.
청룡부대:
- 파병기간; 1965.10.9-1972.2.7
- 예하부대: 제1.2.3연대, 포병대대, 직할대.
- 주둔지역: 베트남 깜란 (1차주둔), 뚜이호아 (2차주둔)
- 남베트남 뚜이호아 청룡1호작전.
전사자명비 (회랑).....삼가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전쟁기념관 식당
'아일러브유' ...매점, 스넥, 기념품
전쟁기념관 주차장
삼각지역 12번 출구
▶ 삼각지 대구탕 골목:
참원조 대구탕
원조 자원 SINCE 1978
원조 원대구탕 02-797-4488
원대구탕 SINCE 1979
솔뫼 짱뚱어탕...
와와 소머리탕,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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