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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 덕수궁, 경희궁, 서울시립박물관- ( 2023.10.29 )

by the road of Wind. 2023. 10. 31.

덕수궁, 경희궁, 서울시립박물관

- ( 2023.10.29 )

 

- 《  덕수궁  》:

 

덕수궁 경희궁 일원을 산책하여 보았습니다. 궁궐의 규모는 작지만 우리나라 근대사를 장식한 곳입니다. 특히 덕수궁에서는 국운이 쇠하여 비참했던 대한제국의 시대 상황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시청에 인접하고 2호선 시청역이 지나는 덕수궁에는 많은 인파가 분볐습니다.  나는 덕수궁을 빠르게 관람한 후, 최근에 복원한 존덕정을 구경하여 본 후, 정동제일교회, 이화여고가 있는 정동길을 따라 경희궁도 돌아보고 왔습니다. 경희궁은 정전 뒤편으로 한참 공사 중이어서 특별히 돌아볼 것이 없었습니다. 경희궁을 지나치듯 둘러보고, 그 곁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도 둘러보았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도 특별한 전시 프로그램이 없었으며, 곧장 밖으로 나와 경내의 전시물 유구와 옛 전차 전시물을 보고 광화문역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유가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산책한 오후의 한 때였습니다.

 

 산   책 : 걸음수 6,699 steps, 거리 4.6 km, 소모열량 249 kcal, 소요시간 01:12 hrs, 속도 3.9 km/h, 기온 21℃.

 코   스 :  2호선 시청역 -  덕수궁  ( 대한문 -  - 광명문 - 중화문 - 중화전 - 분수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대한제국역사관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정광현 - 덕흥전  ) - 정동제일교회 -  정동극장 - 이화여고 - 경희궁 - 서울역사박물관 - 5호선 광화문역.

 

 

● 덕수궁: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 (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 문화재청 )

 

 

덕수궁 연표:

 

1932년 (태조1) 조선개국 

 

1500년대 (임시행궁):
1592 (선조25) 임진왜란 발발.

1593 (선조26)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옛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행궁으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1595 (선조28) 궁역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움  

 

1600년대 (법궁):

1608 (선조 41) 선조 석어당(추정)에서 승하. 다음날 광해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1611 (광해 3)  광해군 창덕궁으로 옮김.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함. 12월 광해군 다시 경운궁으로 옮김.

1615(광해 7)  광해군 창덕궁으로 다시 옮김.

1618(광해 10) 인목대비의 를 폐위하고 석어당에 유폐.  

1623 (인조 1) 인조, 반정에 성공한 뒤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창덕궁으로 옮김. 

 

1800 - 1900년대 (대한제국의 멸망):
1876 (고종13) 강화도 조약 체결, 문호개방 시작.

1896 (고종33)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

1897 (고종34) 고종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돌아옴.

1897 (광무 1)  대한제국 선포. 고종 황제 즉위.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함. 

1904 (광무 8)  러일전쟁 발발함. 대화재로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등 전각 소실.

1905 (광무 9)  증명전에서 을사늑약 체결.

1906 (광무10)  대안문(大安門) 수리하고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

1907 (융희 1) 순종 창덕궁으로 옮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기 시작.
1910 (융희 4)  석조전 완공.

1919 고종,함녕전에서 승하함.

1938  석조전 서관 완공.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개관.

1945  광복

1946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열림.

 

2011 증명전 개관.

2014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서울시청 앞

 

덕수궁 관람 안내:

 

관람시간:

매표 및 입장시간: 09:00 ~ 20:00.
관람시간: 09:00 ~ 21:00. (야간개방: 오후 21시까지)
* 휴궁일: 매주 월요일.

▶ 관람 요금:  

1. 내국인:
- 일반권:  (만 25세~만64세)>: 개인 1,000원, 단체(10인이상)  800원.


2. 외국인:
- 일반권: 대인((19세~64세)>: 개인 1,000원, 단체(10인이상)  800원.
- 무료관람: 
    . 만 18세 이하, 
    .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 한복을 착용한 자

3. 특별권:
궁궐통합관람권: 관람시간내 10,000원 ( 구매일로 부터 3개월 이내 사용 가능(1회에 한장), 4대궁 및 종묘 관람권 포함)
상시관람권: 관람시간내 10,000원 ( 구매일로 부터 1개월 이내 사용 가능(1회에 한장), 덕수궁, 창경궁만 관람 가능)
시간제관람권: (12:00 - 13:00)  
   . 30,000원 ( 구매일로 부터 1년간 사용 가능(1회에 한장), 덕수궁, 창경궁만 관람 가능)
   . 100,000원 ( 구매일로 부터 1년간 사용 가능(1회에 한장), 덕수궁, 창경궁, 경복궁, 14개능 관람 가능, 동반1인 무료입장)
점심시간관람권: (11:30-13:30) 3,000원 ( 구매일로 부터 3개월 이내 사용 가능(10회 한장)

4. 기타사항: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관람은 별도로 인터넷 예약을 하셔야 관람이가능합니다.
덕수궁미술관을 이용하실 분은 덕수궁 관람권과 미술관의 관람권을 별도로 구입하셔야 합니다.

5. 무료관람 및 할인:


(1) 무료관람:
- 국빈, 외교사절단 및 그 수행자,
-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내국인 (단, 외국인은 만 18세 및 만 65세 이상)
- 한복을 착용한 자
- 국가유공자, 현역군인(사복 착용시 휴가증 등 제시)
- 다자녀 부모... 등등
-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2) 할인: 
중구민:  50% 일반관람료 할인 (신분증 제시).

대한문(大漢門)

 

대한(大漢)’은 ‘ 한양이 창대해 진다 ’는 뜻이고, 한양(漢陽) 한수(漢水), 곧 한강(漢江)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漢)’은 ‘ '하늘’, ‘한수(漢水)’는 ‘은하수(銀河水)’를 뜻한다. 현판글씨는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이 쓴 것이라한다. 

○ 남정철(南廷哲, 1840~1916) : 자는 치상(穉祥), 호는 하산(霞山), 본관은 의령(宜寧). 조선 후기 학자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의 문인이다. 1894년 특진관(特進官 : 궁내부에서 왕실 일을 보좌하던 벼슬)이 되었고, 1909년(융희 3) 나이 많은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일본 작위인 남작(男爵)을 받았다.   

 

 

↗ 석조전, ↑ 국립현대미술관

 

금천교 옆의 하마비
"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원개하마) "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 하마하시오.

 

 

대한문 방향

 

덕수궁

 

덕수궁 터에는 원산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다가, 광해군이 1611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의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 영국, 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 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광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만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및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광명문: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이다. 함녕전 남쪽이며,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 사이에 위치한다.

 

중화전 방향

 

함녕전 덕홍전 |  咸寧殿. 德弘殿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919년에서 승하하셨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어졌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드렸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건물이다. 함년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唯賢門)과 정식적인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흥전은 고위 관료와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함녕전


함녕전은 1897년 건립되었으며, 내전의 주요 전각으로,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함녕전 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함녕전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께서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보물 제820호.

 

 

임금님 용상....어좌 등이 간소한 느낌이다.

 

덕홍전

 

덕홍전, 중간의 파란색의 정관헌, 오른쪽의 함녕전

 

 

덕홍전


덕홍전은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덕홍전은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함녕전 방향

 

 

중화전 ... 덕수궁의 중심건물, 정전(正殿)

 

답도의 화려하고 정교한 용 무늬

 

중화전 임금님 용상

 

중화전 일원

중화전과 그 앞마당은 국기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중화전 앞에는 2단으로 된 월대가 있고 마당에는 넓적한 돌을 깔았으며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과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卽阼堂)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지어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삼았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에 큰 화재가 나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탔다. 이에, 1906년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중화전이다. 중화문과 행각도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의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  & 품계석  

중화전의 앞마당은 국가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중화전 앞에는 2단으로 된 월대가 있고 마당에는 넓적한 돌을 깔았으며,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과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덕수궁 중화전 품계석(品階石)품계석은 좌우에 각각 12개씩 모두 24개가 놓여져 있으며, 조선의 품계는 모두 18계로 나누어져 있다. 품계석은 좌우로 12개씩 나뉘는데, 좌(左)에는 문신(동반)이 우(右)에는 무신(서반)이 서게 된다. 그리고 1품과 3품은 정종(正從)으로 나누어서 1품에서 3품까지의 품계석은  좌우 각각 6개씩 모두 12개가 된다. 4품에서 9품까지는 정종 구분없이 품계석을 세워 좌우 각각 6개씩 모두 12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품계석은 모두 24개가 된다. 품계석을 36개가 아닌 24개로 한정한 것은 조선이 농경사회에 근간을 둔 국가이기 때문이며, 24라는 숫자는 곧 24절기를 뜻하고, 24절기는 농경사회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년의 절기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중화문 방향

 

석어당 방향으로 나가본다.

 

석어당


석어당:  창건 연대 미상.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갔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 앉히고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화전 뒷편 그늘에서 앉아 쉬고 있다.  외국에 관광 다니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준명당 & 즉조당


준명당 (浚眀堂)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다. 이후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즉조당 (卽阼堂)은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이 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석어당 내부

 

정관헌

 

정광헌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했으며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생각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이 짐작되는 곳이다.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게한 건물이다. 지금은 여기 잠시 앉았다 갈 수도 있다. 일반인들도 잠시 잠깐이라도 덕수궁 정관헌에서 세상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으며 좋을 것이다.

 

 

함녕전, 덕홍전 방향

 

 

정관헌 내부 

 

 

정광헌은 1900년경 고종의 침소인 함년전 후원에 지어진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건물이다. 건물의 동.서.남 세 방향에 지붕이 돌출된 포치(Porch) 형태로 나무 기둥과 금속 난간이 세워져 있다. 기둥 뒷 윗분과 난간에는 모란과 박쥐, 소나무, 사슴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역대뢍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셔 두기도 했고,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황태자 시절 초상화인 예진을 그리던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즉조당

 

즉조당 내부

 

중화전 뒷모습

 

2층의 석어당

 

준명당

 

석조전 & 대한제국역사관

 

중세시대 로마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건축물이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관람(해설) 안내  ( 02-751-0753 )

참여 방법: 1.2층> 인터넷 사전 예약 (덕수궁 홈페이지), 
- 관람 방법: 1,2층> 해설사 인솔 관람 (제한 관람), 
- 관람 소요시간: 일반해설 약 40~45분/ 심화해설 약 65~70분

 

석조전 1.2층:
  - 관람(해설)시간:
   * 화요일(6회): 09:30, 11:00, 13:00, 14:30, 15:30, 16:30 

   * 수~금요일(9회): 09:30, 10:00, 10:30, 11:00, 13:00, 13:30, 14:30, 15:30, 16:30

   * 토~일요일(11회): 09:30, 10:30, 11:00, 11:30, 13:00, 13:30, 14:00, 14:30, 15:00, 15:30, 16:30 
   * 공휴일(6회): 09:30, 11:00, 13:00, 14:30, 15:30, 16:30 

  ▶ 관람자 유의사항:
- 예약은 관람일 7일전 오전 10시부터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접수 
- 만 65세 이상과 외국인은 매회 5명 석조전 안내데스크 선착순 접수, 입장 가능. 신분증 제시 필요.
   ( 09:30, 16:30 회차는 현장 접수 없음) 
- 관람시간 5분 전부터 입장 가능, 시간 경과시 입장 불가.
- 미취학 아동 및 초등학교 4학년 이하 단체 참여 불가.

 

 

 

국립현대미술관

 

석조전 2층 발코니

 

돈덕전

 

돈덕전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7:30

입장마감: 17:00

* 음식물 반입 금지

 

 

 

 

돈덕정 내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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