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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② 덕수궁, 경희궁, 서울시립박물관- - ( 2023.10.29 )

by the road of Wind. 2023. 10. 31.

 덕수궁, 경희궁, 서울시립박물관

- ( 2023.10.29 )

 

- 《  경희궁, 서울시립박물관   》:

 

 

경희궁:

 

경희궁조선시대 궁궐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 살던 새문동집터를 광해군(光海君)이 몰수해서 1617년(광해군 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12년)에 완성하였으며, 그 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다.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비극적으로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사적 제 271호이다.

 

 

경희궁 가는 길:

 

돈덕전을 뒤로하고 덕수궁 돌담길로 나선다.

 

평성문...덕수궁 돌담길로 통하는 문이다.

 

덕수궁돌담길.... 군세군본영, 광화문 방향 

 

정동제일교회 앞 로터리 방향

 

정동제일교회 앞 로터리

 

정동제일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교회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역사의 산 증인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 대통령 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교회이기도 하다. 왕조시대-> 식민지 시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과정을 단숨에 거치고 이룩한 위대한 세계사적 성과는 조선시대 말기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서양 문물 유입으로 그 공헌이 지대한 것이다.

 

정동제일교회

격변의 시대, 청년들의 교육과 독립운동의 중심지

정동제일교회는 배재학당의 교장이었던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최초의 개신교 교회입니다. 이곳에서 이승만 전 대총령, 서재필 박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주시경 선생 등 개화기에 큰 영향을 미친 인불들이 예배를 보며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정동 제일교회 예배당에는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3.1운동 당시에는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일제 강압기 항일활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열렸으며, 1920년 이화여고생이었던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정동길...

 

↑ 630m 경희궁, ↓ 350m 시청역

주요시설 안내: 서울특별시청, 서울역, 덕수궁, 남산공원, 숭례문, 경희궁   

 

극립정동극장

 

<- 덕수궁 증명전...이곳 일대는 곳곳에 볼만한 우리나라 근세의 역사적 유적들이 많다.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증명전의 본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전각이었다. 처음에는 1층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불에 탄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1904년 덕수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증명전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머물렀다. 증명전 외에도 환벽정, 만희당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잇었으나, 1920년대 이후 증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졌다. 증명전은 1905년 일본의 강압 속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구 신아일보사 별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예원학교

 

보호수: ..... 회화나무, 수령 약 520년, 수고 17m, 나무둘레 516cm... (1976.11.17 지정)

 

 

 

작은 형제회 수도원,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 1182-1220):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태리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1205년 산 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회칙을 인준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 형제회'가 시작되었다. 1224년 라벨르나에서 양손, 양발, 옆구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고, 1226년 10월 3일 밤 아씨시의 프르지운꼴라에서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장수회관, 힘이 나는 커피생활...

 

한성교회..

 

앗, 새문안로

 

'학교앞 분식'

 

 

경희궁:

 

경희궁 정문,  흥화문...

 

공용주차장 주차요금

- 시간제 요금기본>: 승용차 1,000원, 버스 3,000원,  초과 5분당>:  승용차 400원, 버스 800원
- 1일주차:  일주차>:  승용차 22,000원, 버스44,000원

-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 80% 감면
- 경형, 저공해 차량, 다듕이 카드소지자 등  60% 감면

- <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방향

 

서울교육청 방향

 

숭정문 (崇政門):


숭정문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광화군 때에 지어진 것으로, 이 숭정문(崇政門)에서 경종,정조, 그리고 헌종이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월대를 2층으로 쌓아 경사를 극복하였고, 계단 중앙에는 봉황이 새겨진 답도가 있고 그 양 옆으로는 돌짐승 모양의 소맷돌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탕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경희궁 지


지정번호: 사적 제271호/ 시대: 1617년 (광해군9)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이곳은 조선시대 5대 궁궐로 꼽히는 경희궁 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이 말과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융복전과 회상전이라는 두 개의 침전이 있었으며, 흥정전과 장락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興元門),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하여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숭정문에서 숭의정 가는 길:

삼도(三道):  임금님이 거둥(임금님의 행차) 하실 때 사용하는 길을 어도(御道)라고 한다. 삼도(三道)에서 중앙의 길을 말한다. 임금님만의 길인 것이다. 숭정전 앞 어도 양편에는 신하들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경희궁 관람안내

 

- 운영시간: 9시 ~ 18시

- 입장마감: 17시 30분 

* 1월 1일, 매주 수요일:  정기 휴관

 

무료해설 안내: 경희궁 숭정문 앞

 

: 2시. 3시

토.일: 1시, 2시, 3시

소요시간 40분

숭정전 (崇政殿):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正殿). 경희궁 창건 공시 초기인 1618년(광해군10) 경에 건립되었다. 국왕과 신하들이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등 세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전전 건물을 일본이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숭전전은 복원된 것이다.

 

 

답도((踏道)  

어도(御道)의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가 있으며, 답도는 '밟고 지나가는 길' 이라는 뜻이다. 임금님은 연이나 가마를 타고 오르니 지나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운궁(덕수궁)을 제외한 4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창경궁,경희궁)에는 답도에 상징적인 동물인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봉황은 태평세월이 되면 나타난다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숭정전의 임금님 용상

 

공사  중으로 어수선한 경희궁

 

오른쪽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자정문 출입이 막혀있다. 공사 중..

 

공사 안내:
- 공사명: 경희궁 자정전 등 보수 정비공사
- 공사 기간: 2023.09.07~ 2023.12.05

자정문

 

=== <  ▼ 2019.07.19 사진 > ===

자정전 (資政殿):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便殿)이다. 1617~1620년(공해군 9~12)사이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선왕들의 어전이나 위폐를 모시기도 하였다. <서궐도안>에 의하여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보관하던 곳.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러니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20)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권도안>에 의하여 정면5칸, 측면2칸의 건물로 복원되엇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측면으로 보는 자정전

 

서암:

태녕전 뒤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 (숙종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현재는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태녕전...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보관하던 곳.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러니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20)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권도안>에 의하여 정면5칸, 측면2칸의 건물로 복원되엇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영조의 어진...

 

경희궁의 느티나무...

 

====< ▲ PHOTO END > ====

 

숭정전을 돌아나간다.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믈관

 

우물:

 

경희궁에서 사용했던 우물(어정)이다. 이 우물은 조선시대 경희궁 창건(광해군 15)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지름이 약 1.3M이며, 현재의 모습은 발굴된 석재를 활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우물 주변으로 방사형태의 돌을 깔아 배수로를 만들었다.

 

오층석탑

 

오층석탑:  시대- 고려, 재질- 화강석, 높이- 2.91m.

오층석탑은 하층 기단에 새겨진 안상(眼象)무늬와, 이전 시기에 비해  층수가 늘어나고 옥개석의 받힘수가 줄어든 형태로서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수평을 이루는 옥개석의 처마 등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결실된 부분은 원래의 부재들과 유사한 종류의 석재로 전통 석재가공 기술을 적용해 제작 복원하였다.  

 

장명등 과 망주석:

 

운현궁 일가 묘소에 있던 장명등과 망주석이다. 장명등은 혼을 밝게 인도하든가 불을 밝히므로써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礔邪)의 기능을 한다. 대체로 봉분 앞 상석 전방에 배치되는데 묘역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망주석은 멀리서 바라보아 묘소의 위치를 쉽게 알아보도록 해주는 기능을 한다. 망주석에는 세호(細虎)를 표시하도록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다람쥐처럼 그리는 경우가 많다. 

 

 

전시회....  "  2023.09.21 - 11.19,  이것 THIS TOO 역시 지도 IS A MAP "

 

서울역사박물관:

 

- 운영시간: 09:00 - 18:00 (입장 마감시간 17:30 )

* 휴관: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 1월 1일.

- 관람료: 무료

 

2023.09.21 - 11.19

이것 THIS TOO 역시 지도 IS A MAP

 

추녀와 선자연:

지붕의 모서리 방향에 놓이는 추녀와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부분으로 지붕 속 흙처리가 되는 산자공간을 구조로 사용하고 서까래를 천장에 매달았다.  

 

우물 천장:- 우물 정(井)자 모양의 장식 천장으로 반자 틀과 널 부분을 일체형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었다.

여장:- 육축(陸築) 위 낮은 담장으로 태극 8괘 문양(하늘, 땅, 불, 물, 못, 우레, 바람, 산)과 전벽돌 벽 부분을 콘크리트 패널로 제작 후 거푸집으로 사용하였다.

 

내부 계단

 

주심포:

기둥 위에 배치한 공포로 살미, 첨차, 소로 각 용소와 가구조립 방식이 콘크리트 구조에서도 적용되었다.

 

귀포:

모퉁이 기둥 이에 배치된 공포로 공포부재인 살미(山彌), , 첨차(檐遮), 소로(小櫓) 와 귀한대(隅限大) 가 별도로 제작되어 조립되었다.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

 

'콘크리트 광화문'은 세종로를 수도의 상징거리로 조성하기 위해 1968년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축에 맞추어 큰크리트로 세워졌다. 당시 도심 내 문화재 중건을 추진한 사람들은 '수도를 새롭게 개발하면서도 도시의 옛 모습을 보존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광화문은 국보건설단 강봉진이 설계하고, 전통 목수 이시형이 제작했다. 이후 조산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고, 경복궁 복원 계획의 하나로 광화문을 원래 있던 곳에 복원하기로 하면서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7년 해체되었다. 콘크리트 광화문의 7개 부재는 도시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고려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했다. 이 부재들은  1960년대 콘크리트를 활용해 문화제ㅐ를 중건했던 사례들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재:

본 전시물은 조선 총독부 건축부재 중 장식 기둥과 주두의 일부이다. 1995년 8월 15일 광복5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철거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가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내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홍례문과 그 좌우 행각 등을 헐어낸 자리에 1916년에 착공해 1926년에 완공하였다. 광복후 미군정청 청사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부터 1982년까지 '중앙청'이란 이름으로 중앙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86년 8월 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95년~1996년 철거를 완료한 후 1998년 독립기념관에 '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아현고가, 홍제육교, 홍제고가, 서대문고가, 서대문육교....

 

북청교(北淸橋) 굥먕주(橋名柱):
북창교는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남쪽윽로 흐르는 삼청동천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다리로 원 이름은 혜정교(惠政橋)  혹은 해교(惠橋)이다. 태종 12년(1412) 개천공사 때 석교로 만들어진 이래 약 500년간 제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1926년 일본 식민정부가 도로개수를 위하여 석교를 콘크리트 다리로 교쳬하면서 이름도 복청교로 개명하였다. 이 석표는 당시 세웠던 교명주로 추정된다. 

소의교(昭義 橋)  교명주 (橋名柱): :
소의교는 만초천의 다리 중 하나이다. 만초천(蔓草川)은 한강으로 합류하던 하천이다. 무악천, 갈월천, 덩쿨내라고도 하였다. 현재 이 하천은 남영역에서 용산역 간의 약 100m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개되었다. 만초천의 다리 중 하나인 소의교의 교명주인 이 석표는 최근 청파로 하구관거에서 발견된 것이다. 

 

 

수선전도(首善全圖).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 주변

 

문인석

 

88서울올림픽 의전버스

 

'전차와 지각생 ( A Streetcar and Tardy Student ) " ....... 

전차 381호 Streetcar No. 381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467호/ 제조시기: 1930년경

이 전차는 1930년경 부터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하였다. 서울에서 전차운행이 처음 시작된 날은 대한제국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 이었으며,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였다. 이후 전차는 1960년대 초반가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이후 버스와 자동차 운행에 오히려 방해가 되자 서울시에서는 1968년 11월 전차운행을 일제히 중단하였다. 이 전차는 서울에 마지막 남은 2대의 전차 가운데 하나다. 2007년 12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온  후 1년간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서 전시하고 있다.   

 

 

교등학교 초반 등교하며 한 때  타고 다녔던 전차 생각이 많이 난다. 시골 촌놈이 지방의 큰 도회지에 나와 이 전철을 보고 무척 신기해 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홍콩에 관광 갔을 때 본 2층 전차 트램이 생각난다. 넓은 차로 중앙에 다니는 트램은 승하차가 용이하고 홍콩의 복잡한 교통 해소에 많은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하철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의 신도비 등...

가운데 비석이 은신군신도비(恩信君神道碑), 왼쪽 것이 은신군묘표(恩愼君墓表)이다. 은신군 진(桭)(1755-1771)은 정조의 동생이며 게보상 흥선대원군에게는 조부가 된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17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가 죽었다. 요절한 그를 위해 정조는 즉위 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었고, 다음 임금인 순조는 인평대군의 후손 남연군으로 하여금 그의 가계를 잇도록 하였다. 은신군신도비는 1783년(정조7)에 건립되었는데, 형인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손수 글씨를 써서 세웠다. 본문에는 은신군의 죽음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으며 그의 이력과 인품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정조의 문장 솜씨와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은신군묘표는 1871년(고종8)에 건립되었으며 이재원(李載元)이 짓고 이재면(李載冕)이 글씨를 썼다. 이 묘비는 은신군이 죽고 약 100년이 지난 다음에 건립되었는데, 1871년 2월 그의 시호가 소민(昭愍)에서 충헌(忠獻)으로 개정된 다음에 세운 것이다. 낙천군 묘표는 낙천군 온(縕) (1720-1737)의 묘비이다. 1764년에 건립되었으며 본무은 김광진(金光進)이 기록하고 글씨는 신광수(申光綏)가 썼다. 낙천군은 본래 채(埰)의 아들인데, 계보상 연령군의 아들이자 은신군의 부친이 된다.

 

 

경희궁 금천교:

경희궁의 흥화문과 경희궁 내의 여러 전각들 사이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인 돌다리.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상은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띤 것이다.

 

운현궁에서 기증한 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