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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문수산(376m), 문수산성 - 김포의 역사적인 격전지 / 2011-12-09

by the road of Wind. 2011. 12. 9.

문수산(376m), 문수산성  - 김포의 역사적인 격전지    /  2011-12-09

 

 

문수산(文殊山)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의 높이 376m의  산으로,  김포 월곶면에 이르면 김포평야에 우뚝 솓은 산이 문수산이다. 문수산 정상에 서면 인천 앞 바다의 월미도, 서울의 북한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조망이 가능한 서부전선의 요충지이다. 문수산에서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북녘 땅을 바라 볼 수 있다. 황해남도 개풍군 일대를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산과 강은 말이 없는데 순하디 순한 동방의 백의민족이 사는 이 금수강산이 반토막이 나 서로를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차거운 현실이 원망 스럽기만 하다. 천하에 이토록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문수산은 불교의 지헤의 보살인 문수보살과 이름이 같다. 문수보살의 지혜로 이 두동강 난 이 백성의 미련한 무지의 날개가 꺽이고 하나되는 그 날이 속히 오길 원한다. 문수보살은 묘(妙)하다는 뜨을 지니며 한 손에 지혜의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지혜의 연화를 들고 사자를 타고 있다. 보현보살과 같이 좌우에서 석가모니불을 협시(協侍)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못된 이념의 혼탁과 아우성들이 문수보살의 사자후로 잠재워지고 이 땅에 조용한 평화가 찾아 오길 고대한다.   

 

등산로:

제1코스(3.8km, 2시간10분): 산림욕장산책로- 전망대- 홍예문-정상-남문방향 능선-주차장

제2코스(4.6km, 2시간50분): 산림욕장산책로- 전망대- 중봉쉼터- 정상- 풍담대사부도비- 북문

제3코스(4.0km, 2시간30분): 고명리야영장- 홍예문- 중봉쉼터- 정상- 문수사- 풍담대사부도비- 홍예문-  고명리야영장

제4코스(6.5km, 5시간): 김포국제조각공원- 구름다리- 홍예문- 중봉쉼터- 정상- 능선길- 경기도학생캠프장

 

문수산성(文殊山城):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에 소재한 성으로 면적이 203,511㎡ 에 달한다.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12년(1812)에 다시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의 군비에 대한 청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보강하면서 문수산에 산성을 축조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축성 공사는 숙종 19년(1693) 말부터 시작, 이듬해 9월에 끝났다. 대략 10개월 정도 소요된 셈이다.  문수산성은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염하를 따라 평지로 이어지다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 다시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도록 쌓아졌다. 이 산성은 둘레가 6201m, 내부 면적이 6만4000평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다. 산성은 모두 돌로 쌓여졌는데 현재 염하와 연해 있는 평지 부분은 모두 파괴돼 성벽이 남아 있지 않지만 문수산 능선에는 성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성벽으로 볼 때 외벽은 35m의 높이로 수직 벽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상단부의 두께는 2m 정도로 비교적 견고하게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의 문루(門樓)와 남·북·동 세 곳의 아문(亞門)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문과 북문을 복원해 놓았을 뿐 모두 훼손돼 위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문수산 정상에는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었는데 현재는 지름 20㎝ 내외의 원형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문수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였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갑곶진에 상륙해 강화성을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문수산성에 50여 명의 군사를 배치, 프랑스군의 내륙 침략에 대비케 했다. 이 무렵 로즈 제독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70여 명의 정찰대를 문수산성 쪽으로 보냈다. 이를 주시하고 있던 조선군의 기습 사격으로 프랑스군에서 전사상자 5명이 발생했다. 프랑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우세한 화력을 이용, 남문으로 돌진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동쪽의 능선을 따라 통진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을 점령하자 남문을 비롯한 부속 건물과 민가 30여 호를 모조리 소각하고 조선군의 후미를 추격하다 짙은 안개로 추격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되돌아갔다.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문수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됐다. 원래는 내륙으로부터 강화도가 침공받을 경우를 대비해 문수산성을 쌓았던 것이지만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문수산성이 강화도 쪽에서 내륙으로 침공하는 적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인식됐던 것이다.  - (이현수 육사 사학과 교수)

 

 

문수산은 강화도 가는 길에 늘 스치기만 하던 곳이다. 그러면서 항상 문수산 정상에서의 전망이 궁금하였다. 오늘은 집사람이 집에서 매주 있는 교회 구역예배를 드린다기에 나는 집에서 쫒겨(?)나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날씨는 영하 몇도인데 춥기도 하고 어디를 가야하나 고민하다 김포 약암 온천을 가볼 심사였다. 그런데 방향은 김포 월곳 문수산성으로 향하고 말았다. 온천을 하더라도 등산을 걸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송정역에서 88번 버스를 타고 김포대학 바로 못 미쳐 청룡회관 (해병대 복지회관)앞에 내리니 12:40분 경이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아  <청룡회관 - 팔각정- 홍예문- 중봉쉼터(헬기장)- 문수산 정상 - 북문쪽 능선- 전망대- 정상 -  중봉쉼터- 홍예문- 팔각정- 김포대학- 청룡회관> 이런 코스로 등하산을 하였다. 산이 높지 않고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볍게 산행할 수 있었으며, 문수산 정상에서의 동서남북의 경치를 시원히 볼 수 있었다. 정상에서 서남방향으로 강화해협과 강화대교가 보이고 강화읍내와 고려산, 혈구산등이 아스라이 보인다.  동남방향으로는 월곳면과 통진읍 방향의 들녘이 바라 보인다. 동쪽으로 하점면 방향에는 애기봉이 있으며 이곳에는 북녘 땅을 향해 매년 12월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점등한다. 한강 하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곳을 점령하는 자가 한반도를 다스리게 되어있다. 그러니 늘 분쟁의 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분쟁은 그 땅에 사는 민중의 한이 된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에서 강을 마주하고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의 산하를 바라보니 감회가 깊었다. 이념과 체제의 상이로 말미암아 혈육이 만나지도 못 하는 현실이다.  다음번엔 남문에서 북문으로 역U자형 산행을 해 볼 생각이다. 이 역사의 땅을 더 자세히 돌아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