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때 - (2013-12-24)
오늘 오후 집 근처 동사무소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나니 뚝도시장 순대국밥 생각이 났다. 그래서 오랜만에 한강가로 나가게 되었다. 이 국밥집 (시골순대국 02-464-3287)은 뚝섬유원지 한강가로 나가서 가면 ㄷ자 형태로 산책도 하면서 갈 수 있다. 수년전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많이 탈 때 자주 다니던 집이다. 순대국밥을 아주 잘한다. 일품이다. 60년대식 어둑한 시장안에 있는데 탁자 4개정도의 좁은 공간에 예순여섯의 할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집이다. 나는 이 집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다. 나의 정서에 딱 맞다. 아주 오래된 재래시장 분위기며, 작지만 밝고 깨끗하고 구수한 식당 분위기이며, 깔끔하고 단정한 할머니 손맛이 깃든 정갈한 음식맛이며, 하여간 나의 정서에 딱 맞는 그런 분위기의 음식점이다. 이런집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면 나의 학창시절 고생하던 옛 생각이 나기도 하고 잊지 못 할 추억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맛 있고 좋다.
길을 가다 길가 어느 허름한 집 문에 놓여있는 크리스마스 튜리와 별 모양의 장식을 보니 아, 오늘이 크리스마스 전날이지 하고 생각난다. 그 옛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법한 그런 모습의 집이다. 문은 열려있는데 인기척은 없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 이 도시에 태어 난다면 이런 집 어느 골방에서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아, 예수님은 그 옛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누가복음 2:12)로 베들레헴의 어느 시골집 낮고 비천한 상태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지. 동방 박사들의 현명하지 못한 대처로 그 때 예수님은 멀리 이집트까지 피신을 가야 했으며, 그 당시 수많은 어린 영아들이 죽어갔지. 그런 예수님은 가난한 부모아래서 고생하시다가 30 초반의 젊은 나이에 종교적인 탄압을 받아 극형으로 처형되셨지. 그러면서도 그분은 끝까지 우리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시고 사랑을 이야기 하고 영원을 이야기 하셨지. 지금 지상에 그 분을 압제하던 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예수님만은 살아서 움직이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처럼 열광하며 그 분을 믿으며, 장래에도 영원하실 분.... 오늘이 그분이 오신 날의 그 전날이다. ......나는 문득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 예배당이 왜 이리 많아? 예수 믿는 놈들은 형편없는 놈들이야 하고 힐난하며 말하지.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까닭없이 편견에 시달리고 있으시는 거야.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강가로 걸어나갔다. 온갖 것으로 썩어버린 세상이구나. 사랑이 식어버린, 아니 사랑을 내팽개쳐 버린 험한 세상이 되었구나.
강가로 나오니 마음도 시원해 진다. 날씨도 푸근하고 한강가의 모습이 마치 초봄의 분위기 처럼 느껴지는데 마음 까지도 자유스러워지는 듯 하다. 집에는 집사람과 배탈이 난 손자와 휴가중인 막내 아들이 있는데, 손자의 힘없고 맥 빠진 모습이 보기에 안쓰럽고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도 나 혼자 이렇게 밖으로 나와 잠시라도 집안을 잊어먹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니 기분이 좋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득 옛날의 일들을 회상 해 보면 어떨 때는 눈물나게(?)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많다. 모든 지나 버린 것들은 봄날의 신기루 같기도 하고 무지개같이 영롱하게 아름답게 느껴진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 돌아서면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 (- 심수봉, '창밖의 여자')
어느 아름다운 여가수의 애절한 목소리에 취한다. 구구절절한 애절함에 취해버린다. 길을 걷고 걷는다. 내 곁에 흐르는 강물을 보고 또 본다.
강가에서 산책을 하니 다시 자전거를 타고싶다. 자전거는 두 바퀴로 달려나간다. 그 바퀴를 굴리고 싶어진다.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오늘. 이 오후에....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도현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패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 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 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 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큇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 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도현(1961~ ):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단국대 문에창작과 졸업/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98년 소월시문학상 대상과 2002년 노작문학상등 수상/ 2007년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 교수로 재직/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등.
'카테고리 구릅 > 일상들 ( life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자전거, 서울 숲 - (2014-01-03) (0) | 2014.01.05 |
---|---|
크리스마스 & 보신탕 맛집 - (2013-12-25) (0) | 2013.12.25 |
월문리 묘적사 - (2013-12-15) (0) | 2013.12.15 |
경희궁 (慶熙宮) 산책 - (2013-11-16) (0) | 2013.11.18 |
김장 끝, 그리고 능동 어린이 대공원 - (2013-11-08) (0) | 2013.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