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남양주 다산유적지 - (2014-12-24)

by the road of Wind. 2014. 12. 26.

남양주 다산유적지 - (2014-12-24) 

 

 

다산유적지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하고 있다. 능내리는 양수리 아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만든 인공호수인 팔당호반에 있는 곳으로 경치가 수려하기 그지없다. 다산 유적지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검소한 생활이 그대로 느껴지는 생가(生家) 여유당(與猶堂)과 , 다산의 묘소 (경기도 기념물 제7호),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동상, 영정, 목민심서등 저서, 거중기등 전시물품도 총58종 304점에 이른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이곳은 실학정신(實學精神)에 기반하여 고통받는 민초들의 애환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매년 10월 다산문화제가 열리며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재조명하기도 한다, 능내리 강변에는 생태공원등이 조성되어 있고 전망대도 여럿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운 팔당호수를 유감없이 바라볼 수 있다. 여기저기 음식점도 산재해 있어 가족 나들이와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여러가지를 볼 수 있어 산교육장이 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여유당(與猶堂): 다산의 생가이며 '여유(與猶)'란 노자에 나오는 말로서 겁이많은 짐승을 뜻한다고 한다. 사방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두려움에서 세상을 조심하며 살아가야 하는 다산의 처지와 현실을 말해 주는 듯하다.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여유당의 뒷동산에 다산의 묘소가 있다.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힌다.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힌 다산의 묘소는 한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하고 있는 듯 하다.

 

"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으면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고 싶으면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 두마디 말을 평생 몸에 지니고 왼다면 위로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아래로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 (아들에게 한 다산의 훈계)


다산기념관: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 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된 거중기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다산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다산문화관: 다산 기념관 옆에 있는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舟橋)를 이용해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을 참배하러 갈 때의 모습을 그린 능행 도와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분야별로 기록하여 놓았으며 조금 더 자세한 자료를 알고자 할 경우에는 컴퓨터를 활용하여 검색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 (1762~1836):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소천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호는 사암, 다산, 열수옹 등이고 당호는 여유당이다. 다산은 8대가 옥당 출신인 명문가이며 부친은 진주목사를 지냈다. 외가는 윤선도의 후예로 윤두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이승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그의 매부였다. 그래서 훗날 천주교와 인연을 맺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성장수학기(1세~21세): 다산 정약용은 4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는 역법, 산수에 통달하였으며, 9세에는 자기의 시문을 모아 <삼미자집>을 만들어 학문의 자질이 있음을 보였다. 부친이 영조의 부름을 받아 호조좌랑에 오르자 부친의 유고를 보고 학문의 현실적인 면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다산은 유교의 가르침을 현실적 측면에서 재검토하고 실학, 서학 등의 방법론을 통하여 그 시대 조선 사회가 필요한 사상의 토대를 확립할 수 있었다. 

출사기(22세~39세): 22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든다. 세자책봉 경축으로 열린 증광감시(增廣監試)의 경시초시(經義初試)에 합격하여 정조와이 만남이 이루어진다. 중용에 관한 질문에서 소신을 지켜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26세부터 4~5년간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벽을 통해 천주학과 서양의 근대 문물, 즉 천문학, 수학, 지리, 망원경등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 협소한 세계관을 탈피하고 유학을 자주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첫걸음이 된다. 28세에 대과에 합격 7품 벼슬인 희릉직장을 시발점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29세에는 공서파의 지탄을 받아 충청도 해미로 귀양 갔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이유는 천주교를 신봉하던 남인 사이의 알력에서 일어난 것이다. 30세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지평이 되었다. 31세에는 진주목사로 있던 부친이 별세하자 관직 사퇴, 마연에서 시묘를 지냈다. 그때 정조의 명을 받고 화성 축조를 위해 기중기를 만들었다. 33세 상복을 벗고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 이후 암행어사가 되는데 경기도 일대의 농민촌인 적성현, 마전군, 연천현, 삭녕군의 궁핍한 생활과 부패한 지방행정은 다산에게 개혁의 의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비행 척결의 대상으로 올린 서용보는 평생을 다산을 질시하고 모살하고자 한다. 39세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모함을 받아 사직 향리로 돌아왔다. 그동안 천주교와 절연하는 소도 올리고 다섯째 아들이 죽는 슬픔도 겪었다. 

유배기(40세~57세): 다산은 탐관오리를 단죄하고 국정쇄신에 노력하던 관리로서의 치적은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붕어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신유사옥으로 다산은 투옥되었고 약종은 사형당하고 약정은 흑산도에, 다산은 강진에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18년간 와성한 저술활동을 하여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 하고 경학에 몰두하여 실학적 입장에서 방대한 유교경전을 고증하고 합리적 해석을 해서 경집 232권, 분집 260여 권을 저술했다. 다산으로서는 불행하지만 우리로서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쇠퇴기(58세~ 75세): 이태순의 상소에 의하여 순조 18년인 58세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저술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에 수록된 형전의 논리를 심화시킨 것으로서 관원들의 부정. 협잡, 숭탈상태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때에도 서용보와의 악연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다양한 분야와 방대한 저술활동을 한 다산은 75세에 고향인 마현에서 1836년 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다산 어록:

 

권학(勸學) : 끊임없이 배우고 깨쳐라
수신(修身) : 몸과 마음을 돌아보라
치가(治家) : 집안과 부모형제를 보살펴라
이재(理財) : 재물과 이익 앞에서 겸손하라
정도(正道) : 도리에 맞는 생활을 하라
위정(爲政) : 이웃의 어려움을 살펴라
용인(庸人) : 사람을 아끼고 귀히 여겨라
교우(交友) : 진심을 다해 사람을 사귀어라

 

 

 

何潭別 (하담별) 하담 선영을 떠나오며  -  정약용

 

父兮知不知 (부혜지부지)    아버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母兮知不知 (모혜지부지)    어머님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家門忽傾覆 (가문홀경복)   우리 가문이 갑자기 뒤집혀져서

死生今如斯 (사생금여사)    생사가 지금 이와 같이 되었읍니다

殘喘誰得保 (잔천수득보)    제 목숨 겨우 부지했지만

大質嗟已虧 ( 대질차이휴)   육신은 슬프게도 이그러졌읍니다

兒生父母悅 (아생부모열)    아들 낳으시고 부모님 기뻐하셨고

育鞠勤携持 (육국근휴지)    기르실 품안에서 정성 다 하셨지요

謂當報天顯 (위당보천현)    천륜의 공 갚으라고 하셨지요

豈意招芟夷 (기의초삼이)    어찌 죄인되어 유배되라고 하셨겠읍니까

幾令世間人 (기령세간인)    세상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는

不復夏生兒 (불부하생아)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마시오

 

 

이 시는 다산께서  1801년(순조1년)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 (현 영일군 지행면)으로 유배를 떠나면서 충청도 충주 가산면 하담 선영에 들러 부모님 묘소에 하직인사를 하면서 피눈물의 비통함으로 쓴 것이다. 사실 이 신유사옥은 셋째 형 정약종이 도성에서 천주교 활동을 하다 탄압의 위험을 느껴 천주교 서적을 몰래 도성에서 밀반출하던 중 거리에서 발각되어 촉발되었으며, 3 형제가 모두 체포되어 약종은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두형제는 증거 부족으로 둘째형 약전은 전라도 완도 신지도에, 약용 자신은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 시(詩)에서 "가문이 갑자기 뒤집혀 졌다"고 탄식하고 있다. 피를 흘리듯 참담하고 비통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한 때의 천주교 입문으로 천주교 사상을 용납할 수 없는 조선의 현실적인 국가권력의 사교척결 정책의 화살을 피하지 못 하고 천주교를 떠났지만 반대파의 끊임없는 의심과 제거 기도로 거의 일생 동안 목숨을 위협당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후에 술회하듯 천우신조로 전화위복이 되어 유배지의 험난한 환경에서도 불철주야 저술 활동과 교육에 매진하여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1822년 다산은 회갑을 맞으면서 " 한 갑자(甲子) 60년은 모두 죄와 뉘우침으로 지낸 날이었다. 지난 날을 거두어서 정리하고 일생을 다시 시작하니, 금년 부터 정밀하게 자시을 닥고 실천하며 하늘의 밝은 명령을 돌아보면서 남은 생애를 마치리라."  -(자찬묘지명). 파란많은 일생의 다산은 특유의 근면과 성실, 끊임없는 노력, 뚜렸한 목표의식으로 일관하여 불운의 일생을 거대한 태산(泰山)으로 일으켜 세우고 이제 세세(歲歲)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상가, 존경받는 영원한 스승이 되었다.    

 

 

 

 回婚 (회혼)    - 정약용 

 

六十風輪轉眼翩 (육십풍륜전안번)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穠桃春色似新婚 ( 농도춘색사신혼 )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生離死別催人老 (생리 사별 최인로)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戚短歡長感主恩 (척단환장 감주은)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此夜 蘭詞聲 更好 (차야 란사성 갱호)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舊時 霞帔 墨猶痕 (구시 하피 묵유흔)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剖而復合眞吾象 (부이복합진오상)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留取 雙瓢 付子孫 (유취쌍표부자손)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목란사(木蘭辭): 중국 장편 서사시로,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에서 지어졌으며, 목란이란 어린아이가 늙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차림으로 전쟁터에 나간 지 10년 만에 공을 세우고 금의환향 한다. 그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목란이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을 시화한 것이다.   

  


다산 선생은 15세 때인 1776년 부인 홍씨와 결혼해 만 60년을 회로하였으며, 결혼후 20여년을 유배생활로 떨어져 살았다. 이 시는 회혼일 3일 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는 마음으로 지었으나, 뜻밖에 회혼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 시가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자 시가 되었다. 부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지는 시이다. 자식 사랑 또한 가없이 느껴진다. 다산이 강진에서 10년째 귀양 살이를 할때 병석에 누운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보내왔다. 아내의 마음을 헤아린 다산은 치마를 잘라 첩(帖) 몇 권을 만들고 두 아들에 대한 당부를 적어 보냈다. 노을처럼 빛 바랜 붉은 치마에 썼다 해서 ‘하피첩(霞 帖)’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산은 문집에 하피첩을 만든 사연을  ‘형제가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 것이고 두 어버이의 은혜를 뭉클하게 느낄 것이다.’ 라고 썼다. 가슴 뭉클하다. 부부의 따뜻하고 깊은 사랑과 자식애는 후세에 언제나 귀감이 될 것이다. 인생의 아름다운 마침이고 결말이다. 다산 선생을 마음으로 우러러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다산 유적지에서 참으로 많은 감회를 느끼고 인생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능내리 다산 유적지 가는 길:

 

팔당댐 직전 전망포인트에서: 

 

 

 

능내역 인근 능내리 비석골에서.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다산유적지 소재 "마현정다산마을(능내리)" 주변 :

 

 

 

 

 

 

 

 

 

 

 

 

다산생태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