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① - (2015.12.25)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다.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이다. 낮고 낮은 말구유에서 탄생하였다. 30세 정도 까지 시골에서 아버지의 목수일을 도왔다. 일반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평범하게 성장하였다. 그러다 30세에 세레자 요한에게서 세레를 받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들기 같이 내리고 음성이 들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것이 간략한 예수의 탄생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변화이다. 그리고 극히 짧은 3 여년 정도를 광야에서 설교하며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하고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예수에겐 확실히 비범한 무엇이 있었다. 형식과 관습을 타파하고 인간을 속박에서 해방 시켰으며 고통에서 구원하셨고 미래에의 희망을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사랑을 갈파하셨다.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로움을 선포하셨다. 예수는 젊은 나이의 짧은 삶을 살고 고난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3일만에 부활하였다고 한다. 부활 사건 뒤에 태도가 180도로 바뀐 제자들은 전면에 나서서 예수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거의 순교를 당하였다. 오늘날 예수는 전인류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불세출의 인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삼위일체 사상을 통하여 그를 하나님이라 믿는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정말 드라마틱하다. 지금 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화 받아 그를 따르며 칭송하고 있다. 오늘은 그가 탄생하신 날이다. 그 스스로는 비천하게 태어나고 가난한 자로 살고 타인을 위해 공생애를 살다가 누명을 쓰고 가혹하게 처형 되었지만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고 수많은 인류로 부터 경배를 받으며 그를 통하여 삶의 희망과 영원한 복락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의 정신은 세세토록 영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신자이든 그렇지 않은 비신자이든 이 날을 경축하고 기뻐할 일이다. 기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아 상식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보았다. 요즈음은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반짝이는 불빛도 구경하기 어렵다.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거리가 즐거운 기색이 없어 보인다. 일반인들은 즐거우면 된다. 앞으로는 활기차고 즐거운 성탄이 되었으면 한다. 축제분위기, 이런 것들이 행복한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수원 화성 산책:
그리스마스를 맞아 아침에 집사람은 큰아들네를 데리고 교회에 갔다. 손자, 손녀와 며느리도 같이 갔다. 작은 아들은 아직 꿈나라를 헤메고 있고, 나는 주섬 주섬 카메라등을 챙기고 수원으로 떠난다. 수원 화성을 구경하기 위하여다. 그동안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수원이란 도시는 나에게 생갱하고 따라서 수원 화성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못 했다. 그런데 오늘 불현듯 이 곳을 가보고 싶다. 수원화성 하면 조선의 정조 임금과 그의 신하 다산 정약용이 생각난다. 그래서 화성을 답사한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창룡문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성길을 따라 역 시계방향의 원형으로 성곽을 돌며 산책을 하였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도 크지만 나는 성곽 길을 걸으며 수원 일대를 보는 재미로 즐거운 산책을 하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가벼운 기분으로 걷기 좋은 길을 걸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수원이란 잘 모르는 도시를 빙 돌면서 일별한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그리고 조용한 수원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였다. 수원은 참 멋있는 옛도시 같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화성은 수원의 꽃이 되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성이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답게 성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그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10년반으로 기확한 성 건축을 어떻게 2년반만의 유래없는 초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을까? 등의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졌다. 운동도 하고, 좋은 건축물을 감상도 하며,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 수원 화성(華城):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힘을 1/2로 분산하는 도르레를 4개 설치한 거중기의 모형은 팔당 능내리의 다산유적지에서도 보았다. 그리고 그 당시 최초로 벽돌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교한 성 건축이 가능하였다. 물론 조선의 모든 기술자들이 총동원 되엇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2여년 후인 1796년에 완공되었다.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 이 고안한 거중기 등이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흑미로 평가 받는다.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화성의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이 그것이다. 그밖에 수문, 장대, 노대등의 시설이 있다.
화성 성곽 외부애서 창룡문 방향으로 바라본다. 나의 산책을 시작하였다.
동문에 해당하는 창룡문을 지나면서 화성의 내부를 바라본다.
창룡문.....동문인 창룡문은 규모도 작고 형태도 간략한 편이다. 역시 옹성이 있는데 아치문이 정면에 있지 않고 서울의 동대문처럼 왼쪽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 보수 중이어서 올라갈 수 없었다.
여기서 부터 전면의 시계역 방향으로 성길을 걷기 시작한다. 보이는 코너의 둥근 시설은 동북공심돈 이다.
창룡문을 뒤돌아 보았다. 펄럭이는 깃발이 엄중하게 보인다.
영(令)이라고 표시된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동북노대...노대란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쏠 수 있게 만든 곳으로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동북향으로 자리잡은 동북노대는 전돌을 쌓아 네모꼴의 대로 만들었는데 모서리를 깍아 모를 없앴다. 대 아래 석축높이 13척, 대의 높이 18척이다.
수원 화성 안에 차도가 지나가고 있다. 성 아래는 지하차도이다.
동공원 일대가 보인다.
보이는 동장대를 향하여 길을 걷고 걷는다.
동북공심돈...공심돈은 전시에 사용되는 관측소로써 위 아래에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동정을 살필 수 있을 뿐아니라 총포를 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성벽 상부에 3층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몸을 가리게 되어 있다.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두 곳이 있다. 모두 백자총과 불랑기등을 발사 할 수 있도록 총포구멍을 내었고 외부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상층과 중층사이에는 문을 달아 사다리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었고 내면에는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연무대 뒤의 성 외곽을 바라본다. 뒤에 팔달산이 보인다.
창룡문 방향...
연무대...연무대(동장대)는 창룡문과 화홍문 사이에 있으며 화성 동쪽을 잘 살필 수 있어 군사 요충지이다. 수원성의 군사시설 중 가장 위용이 있고 군사지휘소의 으뜸이 되는 곳이다. 평상시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장대이다.
연무대의 당당한 모습...
수원 화성을 순환하며 다니는 청룡열차...빨간 색이니 적룡열차?
화성 관광안내도...
연무대를 다시 바라본다.
서울 방향의 수원 시가지...멀리 산 줄기에는 백운산, 광교산, 비로봉, 형제봉 등의 산이 보인다.
북동포루...우뚝하다. 적을 조망하기 좋다.
동암문이다.
옛 성곽은 왠지 마음을 동심으로 이끄는 것 같다. 아름다운 성곽이다. 동암문 간판.
동북포루....동북포루는 각건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으로 지세가 갑자기 높아져서 용두를 굽어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가까이서 본 동북포루.
'장안위좌랑' 이란 표시석이 있다.
수원의 화성에서 가장 인기있는 포인트이다. 방화수류정과 그 앞의 연못인 용연...
수원방화수류정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 정자'라는 뜻으로 각루의 기능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나 우리나라 최고의 정자로 꼽힌다. 그러나 이곳의 원래 이름이 동북각루로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절벽아래의 용연과 함께 경치 또한 좋은 곳으로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하기 적합한 곳이다.
가까이 다가본 방화수류정 모습...건축미가 최고이다.
방화수류정 현판. 글씨는 조윤형(1725~1799)이 썼으나 현재의 것은 김기승(1909~2000)이 1956년 가을에 쓴 것이라 한다.
걸어온 길을 다시 본다.
붃문에서 바라 본 연못, 용연....한폭의 그림이다.
북수문...그리고 그 위에 화홍문....수원성을 흐르는 물은 용연에서 물이 한 번 휘돌아 나와 북수문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 빠져 나가게 되어있다. 북수문은 7개의 홍예문을 내었다. 수문위로는 돌로 다리를 깔고 그 위에 누각을 세워 화홍문이라 하였다. 화홍문은 수문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만든 주각으로 수문 바깥쪽으로는 여담을 쌓았다.
수원천... 용연에서 물이 한 번 휘돌아 나와 북수문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 빠져 나간다.
청룡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홍예문을 지나오면서 방화수류정을 다시 바라본다.
장안문 방향으로 간다. 수원다운 한옥이다.
동북포루.
장안문이 점점 가까이 보인다.
장안문... 수원성의 북문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다. 돌로 높이 쌓은 육축 중앙에 홍예문을 내고 육축위에는 2층의 누각을 세우고 앞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문의 좌우에는 높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성벽보다 돌출된 적대가 있다. 누각은 2층 목조건물이다. 반원형의 옹성은 성문과 달리 벽돌로 쌓았으며 아치의 상부에는 오성지라는 구멍이 5개 뚫린 일종의 물탱크가 있는데 이는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하여 만든 것이다.
북동치....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포대가 장착되어 있다.
장안문의 위용. 화성의 북문에 해당한다.
장안문의 내부.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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