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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길 (trekking)

① 인천 차이나타운,자유공원,월미도 - (2016.01.23)

by the road of Wind. 2016. 1. 24.

 

인천 차이나타운,자유공원,월미도 ① - (2016.01.23)

 

 

인천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월미도를 다녀왔다. 인천역에 내리면 도로 건너에 중국식의 건물과 색채가눈에 띄는데 그 곳이 그 유명한 차이나타운이다. 나는 인천에 한 때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이곳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늘 궁금증만 더하고 하다가 이번에 한번 다녀왔다. 오늘의 기온은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혹한이었다. 전국적인 대단한 한파주의보 상태였다. 인천 중구는 -15~-7 ℃ 정도의 기온이었다. 그런데도 오전에 집에만 처밖혀 있다가 답답해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냥 인천행 전철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나갈 때 옷을 자전거복 위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섰는데 이상하게 장시간 밖에 돌아다녀도 추운 줄 몰랐다. 결과적으로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에비 답사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곳을 더 자세히 다니고 풍물을 보고 음식도 먹어보고 편한한 상태로 쉼터에서 여유도 가져보고 하여야 진정한 답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주마간산격이었지만 대만족한다. 새로운 것을 본다는 게 너무 좋았다. 인천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나의 산책 코스: 인천역 -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 인천역 - 월미도- 월미산 - 인천역.   

 

 

차이나타운

 

차이나 타운은 청나라의 문화와 우리나라문화가 동시에 공존하는곳,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후 중국인들이 모여 살면서 중국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곳, 개항기의 이국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인천의 중요한 문화 관광지이다. 오후 3: 30분에 1호선 인천역에 내려서 먼저 길건너 차이나타운 부터 가보았다. 날씨는 춥고 해 질 때까지의 시간은 촉박하고 곧 바로 차이나타운 중심의 길을 직선으로 자유공원으로 걸어 오르면서 겉보기 사진만 좀 찍었다. 그리고 맥아더장군 동상이 있는 인천의 유명한 자유공원으로 올라갔다. 평상시 나는 중국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붉은 원색이 그렇고, 용(龍) 모양의 장식도 그렇고, 건축물의 스타일이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것도 그렇고, 공중 부양같고 비현실적인 영화나 검객들의 무술이나 몽환적인 소설이나 ...아무튼 모든 것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마음에 들지않았다. 단 한가지 장가계나 계림, 양자강 등 중국의 자연 경치는 위대하며 나를 너무 현혹하고 있다. 그리고 두보나 공자나 노자나 맹자나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는 너무 나에게 큰 감명을 주고 인생의 지침을 주어서 좋다. 한자도 너무 아름다운 글씨이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중국적인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나의 비호감이 괜찮아지는 것이다. 오늘도 차이나 타운을 잠깐 거닐면서 주변을 볼 수록 심미한 매력에 빠지는 것 같았다. 밥 때가 아니고 시간이 촉박하여 한가히 짜장면을 먹기도 그렇고 하여 생략하였는데 이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에 할 숙제다. 

 

인천시 중구 관광안내도. 위의 좌측 섬이 영종도, 그리고 우측으로 월미도, 그 다음 우측에 인천역,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천은 지금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관광안내도... 푸른 색의 자유공원과 그 아래 차이나타운이 그려져 있다.

 

 

차이나타운: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사람들로 형성되었다. 인천 화교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군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하였다. 그 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고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 와  청국 영사관 이곳에 세워지면서,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져 차이나타운의 시초가 되었다. 인천 조계지의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당시 화교의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대거 건너와 주로 인천을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6.25 전쟁 후 화교 사회는 한국에서 외면을 당하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났다. 이제 인천 차이나타운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급부상으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  

 

인천역에 내려 광장을 나온다. 인천역 건물 색갈이나 스타일이 묘하다. 일제시대의 건물 같다. 그리고 곧 길건너 차이나타운을 바라보게 된다.

 

인천역 광장의 하트 조형물...이곳은 인천시 중구이다. 겨울에도 싱싱한 화초가 아름답다.

 

차이나타운 입구 조형물 '중화가(中華街)이다. 패루의 모양이 대단하고 정교하며 아름답다. 마치 중국 본토에 온 것같은 착각이 든다. 중화란 말이 얼마나 중국의 자존심과 위신력을 드러내는 말인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중국이란 나라는 뭔가 대단한 것 같다. 건축물도 조금은 위압적이고 독특한 개성이 있어 보인다. 

 

인천차이나 타운에는 총 3개의 패루가 세워져있다. 이것도 그 중 하나이다. 패루 재료는 모두 중국에서 직접 만들어 들여왔다고 한다. 

기둥에 세긴 문양이 참 정교하고 대단하다.  

 

패루(牌樓): 중국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문형(門形)의 건축. 패방(牌坊)이라고도 한다. 충신, 절부, 효자 등의 현창시설로 시작된 것으로 근세에는 주로 묘(廟)와 사(祠)의 앞에 세워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도시의 중요거리 장식으로도 활용하고 때로는 기념비 건축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주간(柱間)의 수에 따라 한간(一間)패루, 삼간패루, 오간패루 등이 있다. 목조가 가장 많으나 석조도 있다. 지붕은 유리와(瓦) 등으로 덮고 문짝은 없으며 채색과 조각으로 외형을 장식한다. 

 

 

차이나타운의 길...좁은 길에 차와 사람이 다닌다. 오늘은 맹추위에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가로등도 아름답다. 중국적이다. 중국의 본토의 거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이다.

 

 

중화원(中華苑)..

 

중화원 앞 건물인데...아주 중국적인 장식이 외관을 특색있게 만든다.

 

 

코너의 나무로 만든 커피 메뉴판이다. 처음엔 이정표인가 했다. . 요쿠르트, 아메리카노,  커라멜 모카...버블 티...

 

완구...

 

그 유명한 '공화국의 봄' 이란 뜻의 '공화춘(共和春)'이란 상표를 사용한 중화식당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짜장면 개발자로 알려진 '공화촌 '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 중턱에 문을 열었고, 당시 인근 인천항에서 일하던 부두 노동자, 중국인 등이 중국요리의 맛에 이끌려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으며, 한국인의 입맛에 맛게 달콤한 캐러멜을 첨가하고 물기를 적당히 유지한 음식인 짜장면을 개발하게 되었느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공화춘이 처음 인천 차이나타운에 문을 열게 된 것은 1908년으로 중국 산동지역 출신인 우희광 선생이 22살의 젊은 나이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첫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공화춘’은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화교들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정부의 화교정책에 밀려 1983년 폐업하고 말았으며, 지금은 인천시 중구에서 2010년 매입하여 짜장면을 주제로 한 국내 최초유일의 짜장면박물관으로 2012년 4월 개관하였다. 지금 이 집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쓰이는 원래의 옛 '공화촌'의 인근에 문을 연 이름이 같은 '공화춘'이란 중화식당이라고 한다.  

 

 

무슨 공갈빵인가?

 

화덕만두.. 인기가 있는 것 같다. .

 

청관..

 

 

'구구만다복'.  대만제과라고 간판에 있네...

 

여기에서 직진하지 않고 오른쪽 계단을 오른다.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만다복(萬多福) 도 보이고....우측 건물 벽에는 '수제월병/왕골갈빵 펑리수과자 전문점' 이란 글씨도 보인다.

 

연경대반점..

 

연경대반점 앞 자유공원 가는 길...계단...계단길에 그림....

 

'옛날짜장'....

 

'오만과 편견' 차이나타운 촬영지...


드라마 '오만과 편견': MBC 월화드라마 대장금 2를 대체 편성 한 작품이다. 2014.10.27~ 2015.1.13 까지 MBC에서 방영된 월화드라마. 로맨틱 코미며 법률 드라마이다. 법과 원칙, 사람과 사랑을 무기로 나쁜 놈들과 맞장 뜨는 검사들의 이야기이며, 돈없고 힘없고 죄 없는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검사들의 이야기이다. 출연진 최진혁, 백진희, 최민수, 손창민등. 

 

 

인천중화교회...

 

왼편 연경대반점 방향으로 뒤돌아보다. 멀리 인천항의 공장지대에 하얀 연기가 보이기도 한다.

 

자유공원 입구,,,선린문도 보인다.

 

기둥의 모양에서 중국의 멋을 느껴본다. 사람의 마음은 똑 같을 터인데 지정학적 요소로 문화가 특이하게 발전되고 다다. 

 

선린문(善隣門)...참 화려하고 아름답다. 선린이란 좋은 이웃을 말하지 않는가? 중국과 우리는 선린의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선린문과 같은 양식으로 세워 어떤 사람이나 뜻을 기념하고 나타내려 하는 건축물을 패루라 한다. 

 

삼국지 벽화 거리..인천시 중구청이 2004년 건립했다.

 

자유공원 앞 제3 패루 선린문에서 뒤돌아 차이나타운 방향을 바라보았다.

 

 

 

 

인천 자유공원:

 

인천시 중구에 있는 공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며, 인천 차이나타운이 붙어있다. 응봉산 전역을 아우르며 정상에는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러시아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게한 인천 소재 외국인 거주자들을 위한 공원으로서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다. 일제 시기에는 서공원(西公園)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는 원래 이름인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1957년 김정렬 인천시장이 취임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천항과 서해 바다,일출 조망처이다.

 

 

차이나타운을 뒤로 하고 돌계단으로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으로 올라간다.

 

 

지나온 차이나타운 선린문 방향의 경치......

 

정자도 보이고...

 

한미수교백주년탑...

 

효도권장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효도하여 본(本)세우자..." 최근의 극악무도한 가정 폭력등 많은 페륜이 저질러 지고 있다. 인간은 근본을 회복하여야 한다. 인간의 마음 속엔 양심도 있고 선한 마음도 있다.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하여야 한다. 수양은 고매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 하여야 한다.

 

자유공원에서 인천항 방향으로...

 

월미도 방향의 경치...월미도 나의 다음 행선지이다. 나는 오늘 월미도 바닷가 방파제 해안을 산책하고 저 월미산을 등산한 다음 인천역으로 회귀하였다.   

 

'한미수교백주년 기념탑' 을 올려다 본다. 날카로움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곳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우리나라를 구한 위대한 전략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자유공원은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더욱 유명하고 뜻있는 곳이다. '자유"라고 발음하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다시 느껴지는 듯 하다. 자유가 없는 삶은 노예의 삶, 죄수의 삶이다.

 

 

인천항이 숲 사이로 언듯언듯 보인다.

 

 

자유공원 안내판...

 

자유공원 광장......

'오만과 편견' 촬영지임을 알리는 간판...그리고 인천항의 상징인듯 배의 닻의 모형 조각이 있다. 멋 있다.

월미도와 인천항 바다가  선명하다...

 

자유공원 매점...그리고 해바라기 3개...

 

맥아더장군 동상을 바라본다. 우리나라를 구한 위대한 인물이 월미도를 바라보고 회상에 잠긴 듯 하다.

 

 

1957년에 인천 상륙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어었다.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문..."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없다...."로 시작되고 있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월미도로 상륙하는 맥아더를 위시한 당시 유엔군 지휘부...자유 해방의 행군이 되었다. 세계전사에 빛나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   6∙25 전쟁시 1950년 9월 맥아더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은 전쟁을 역전 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6∙25 전쟁 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인천은 서울에서 3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며,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난점이 있었다. 인천항은 수로가 좁아 큰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했고, 인천이 지리적으로 멀어 작전지원이 어렵고 조수∙간만등 자연조건이 불리해 당시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에 주력한 북한군도 이런 요소 때문에 위험성을 간과하여 허를 찔리게 되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지모와 전략, 용감성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대승리를 이루었다. 지도자의 중요성과 역할이 다시 돋보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지역 북한군의 병력규모는 약 2,000여명, 서울, 인천에서 활동중인 병력은 약 10,000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미군은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이 창설하였고 병력이 7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9월 15일 새벽, 제 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 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고, 월미도에 상륙해 돌격을 감행할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유엔군은 북한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17척의 상륙용 주정으로 월미도 녹색해안에 도착한 상륙 부대도 돌격을 시작하여 마침내 유엔군의 화력 앞에 북한군은 투항하기 시작했다.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 상륙작전은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 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에, 미 제 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에 각각 상륙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렇게 진행되었고, 상륙작전 이후 우리 국군은 15일만에 38선까지 탈환하였다. 위대한 작전의 성공이다. 맥아더장군 브라보! 우리나라 만세!

 

 

미해군기념재단 헌정비. 맥아더장군과 상륙작전 광경이 부조되어 있다.

 

 

" ...the most masterly and audacious startegic stroke in all history...

...dedicated honor all U.S army personnel who served in the korean war, june 25, 1950 to july 27, 1953."

 

placed june 22, 2000 by the united states navy memorial foundation,  washington D.C.   

 

...모든 역사적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담한 전략적 타격...1950.6.25~1953.7.27 근무한 미해병에 대한 존경으로 헌납하다...

워싱턴 D.C. 소재 미해군기념재단이 2000.6.22 설치함.

 

 

인천시민헌장비....

 

 

 

자유공원에서 인천역으로..

 

인천제일교회 방향으로 계단길을 내려간다. 어떤 산책객의 이야기만 듣고 내려간다. 도로가에 월미도 가는 버스를 기대하면서..멀리에서 보니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내려갈 방향의 경치...

 

자유공원 공용주차장...

 

<- 인천아트플렛폼, 근대건축전시관,혜명단청박물관,  -> 신포패션문화의 거리, 성공회내동교회, 홍예문...

 

단 & 계단...

 

친천제일교회, 각국조계지계단... 

 

 

각국조계지계...근대 개항기에 인천에는 이 지역에 정착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해 조계지(租界地)가 설정되었고, 응봉산 (현 자유공원)에는 각국 공원이 조성되어 유명하게 되었다. 여러 곳에 계단이 만들어졌고, 청국 조계지와 일본 조계지 경계에 만들어진 이 각국조계지게단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1호) 이 대표적이다. 자유공원의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은 계단 자체의 가치는 적으나 역사성 및 장소적 측면의 가치는 높다.

 

<- 자유공원, -> 인천아트플렛폼, 근대건건축전시관, 혜명단청박물관...

 

멋진 나무집...어떤 아주머니 말처럼 도로로 가지말고 우측으로 직진 인천역으로 가야 월미도 가는 버스가 많단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구)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

일본이 한국의 금융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구 인천일본18은행지점은 1890년에 준공되어 그 해 10월에 개점하였으나 은행으로서의 업무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는 상태이며, 1954년에는 한국흥업은행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축조양식은 단층으로 고전적 장식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벽체는 조적 위에 몰탈마감으로 기둥부위와 기단부위는 돌로 마감되어 있다. 출입구의 석주 양식은 아주 정교하게 시공되어 있으며 지붕은 목조 트러스 위에 일식기와로 모임지붕 형태를 하고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현재는 중구 개항장 일대의 근대건축물의 현황을 소개하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인천역 방향으로 직진한다.

 

인천시 중구청..

 

다시 차이나 타운 입간판을 만난다... 

 

 

자유공원방향...

 

 

인천항 방향...

 

<- 의선당, 짜장면박물관 (200m),  -> 한중문화관, 인천문화재단, 제물진두 순교성지(270m)...

 

 

 

화장품 가게..

 

 

인우공사(仁友公司)... 참, 고색창연하다....

 

 

 

징그럽다...중국인들은 복을 상징하는 용을 무척 좋아한다...

 

 

한중원...

 

인천 해안천주교...

 

<- 한중문화관, 근대건축전시관,  -> 송월동 동화마을, 삼국지 벽화거리 (100m), 인천근대박물관(100m)...

바빠서 이것들을 둘러볼 시간이 없다. 어서 월미도로 가야한다. 시간없음...

 

이 좁은 건물사이 골목으로 가면 인천역이 있다네...뒷 골목에 60년도를 걸어 가는 기분이다.

 

골목길 가다 우측으로 보니 '짜장면박물관" 건물이 나왔다. 특등요리 공화춘....짜장 원조 중국집 간판이 보인다....

 

짜장면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 중턱에 위치한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중국인이 이 일대 5,000여 평에 청국조계지를 설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요리집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인근 인천항에서 일하던 부두 노동자가 중국요리의 맛에 이끌려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좀 더 값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짜장면을 개발하게 된다. 짜장면은 중국된장인 미옌장(甛麵醬)을 비벼 먹는 작장면(炸醬麵)과 달리 달콤한 캐러멜을 첨가하고 물기를 적당히 유지하여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는데, 곧바로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어 대표적인 ‘한국음식’으로 자리매김 한다. 짜장면이 초기 개발하여 판매된 곳은 공화춘(共和春)이다. 공화춘이 처음 인천 차이나타운에 문을 열게 된 것은 1908년으로 중국 산동지역 출신인 우희광 선생이 22살의 젊은 나이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첫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공화춘’은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화교들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정부의 화교정책에 밀려 1983년 폐업하고 말았다. 2층 구조물의 69평 규모인 ‘공화춘’은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型)의 중국식 건축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공화춘’은 눈목자(目)형 건축물로 앞뒤에 일(一)자형 건축물이 있고 그 사이 공간에 4개의 건축물이 연결된 것이 주된 특징이며, 1층 기단부는 화강석을, 2층 창호는 목제창으로 만들었다. 2006년 4월 등록문화재 246호로 등록 지정되었다. 하루 700만 그릇이 팔린다는 국민음식 짜장면의 최초 발원지인 옛 ‘공화춘’은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2010년 매입하여 짜장면을 주제로 한 국내 최초유일의 짜장면박물관으로 2012년 4월 28일 개관하였다. 현재까지 약 20만명의 국내·외 방문객이 찾고 있다. 짜장면박물관짜장면과 공화춘에 관련한 전시유물을 다량 보유하고 있으며, 과거 공화춘 주방과 접객실을 그대로 재현하여 인천에 살고 있는 화교들과 중·장년 층에게 향수를 제공하고, 젊은 층에게 근대 음식문화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짜장면박물관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근대 우리 생활모습을 돌이켜 보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 <짜장면 박물관 >


관람소요시간: 40분 (전시물에 관한 해설 제공)/     안내전화: 짜장면박물관 : 032) 773-9812                   

 

인천역 앞 이집...옛날 밴댕이회 무침을 아주 잘 먹었던 집...'목포밴댕이'... 이 곳엔 밴댕이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드디어 인천역 앞에 왓읍니다, 만세...건너편 역전 앞에서 월미도 버스만 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