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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 ( 2018.06.02 )

by the road of Wind. 2018. 6. 3.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 ( 2018.06.02 )



남한산성(南漢山城):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관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하는 곳 이기도 하다.둘레의 길이가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2014.6.22 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남한산성 문화재: - 남한산성, - 남한산성 행궁, -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남한산성 사찰( 망월사터, 장경사, 개원사터, 장경사 동종)



관련 이미지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토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토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토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 한남문.  



하이킹: 소비열량 487 kcal/ 거리 8.52 km/ 소요시간 3:37 hrs (11:21am-2:58pm)/ 고도: 491 m (수어장대).

산책코스:  남한산성 로터리 주차장-  북문(전승문)- 서문 (우익문) - 수어장대 - 서문 (우익문) - 서문 전망대- 서문(우익문)- 북문(전승문) - ( 아라리오식당 점심) -  남하산성 행궁- 남한산성 로터리 주차장.


오늘은 우리 막내 처제 내외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얼마전 처제의 막내 아들이 멘사(mensa)에 최고 점수로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축하한다고 하였는데, 오늘 식사를 한번 내겠다고 하여 같이 남한산성에 놀러간 것이다. 날씨는 무덥다는 예보였으나 막상 남한산성 길 산책에 나서니 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남한산성 주차장은 평소 주말에는 놀러오는 차량들도 만차가 되어 차 댈 곳을 찾지 못하는데 오늘은 11:0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인데도 간신히 차를 파킹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빨리 가야만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주차 상황인데 놀랍다(?). 무더위란 일기예보에 남한산성 산행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우리 처제와 손 아래 동서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즐겁고 내 마음이 들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로 직장생활 할 때는 바쁘고 짬을 낼 수 없어서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나이먹고 은퇴를 하고나니 이런 귀중한 시간도 갖게 된다. 나는 평소에 가족들과도 이런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친척들과의 이런 모임을 갖게 되니 감격하는 듯 기쁘고 마음이 즐겁다.    


동서 내외는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좋으며 우리와 컴비가 잘 맞는다. 생각하는 경향이나 느끼는 점이 잘 상통함을 느낀다. 무엇보다 인생관이 비슷하다. 나는 이런 동서와 처제를 만난 것을 축복으로 여긴다. 주변에 나와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늘도 나는 소풍간 것 처럼 기쁘고 마음이 흡족하였다. 집사람과 처제가 남한산성 길을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너무 좋아보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격의없이 소통할 수 있는 형제자매가 얼마나 소중한가?  나는 내 친동생들, 제수들과도 소통이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외로운 처지인데,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이런 동서와 처제가 있다는 것이 여간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내가 만약 멀어져간 우리 며느리와 손자들을 데리고 이런 가족 나들이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나는 많이 감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씨는 무더운 것 같은데 막상 산책을 하니 남한산성 길가 소나무들이 반갑게 그늘을 만들어 주어 아주 좋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였으며 맑은 날씨에 주위 풍경이 너무 선명하고 좋았다. 모두들 즐거워 하며 걷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발전하고 시민들이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구나 생각하니 나라를 이렇게 발전 시킨 우리의 부모, 선배들의 땀흘린 노고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산책은 북문(전승문)으로 부터 이어진다.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통과하면 하남시 상사창동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한강, 북한강, 남한강 이용하여 수운(水運)으로 옮긴 세곡(稅穀)을 등짐에 지고 이 북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추측디는데,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 는 뜻으로  전승문(全勝門)이라고 한다.


남한산성 길은 넓고 걷기에 좋다. 시나브로 길을 올라가니 이제 서문(우익문)이 나온다.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우익문(右翼門)이라 고도 부른다. 서울 광나루나 송파나루을 바라보고 있으며, 서문 아래 산 능선은 아주 급경사다. 남한산성 4개의 성문중 규모가 가장 작다고 한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문을 통과한다. 제일 좁은 문으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걸어서 산 비탈을 내려 갔을 것이다. 얼마나 비통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서문 옆 의자에 앉아 음료를 조금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마침내 청량산(497m) 수어장대에 오르니 그 옛날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국난의 긴박한 순간에 종묘사직과 조국을 수호한다는 엄중하고 큰 책임감을 가지고 이곳에서 군대를 호령했을 장수를 생각해 본다. 얼마나 노심초사가 컸겠는가? 10만 이상의 청군이 성을 애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남한산성을 보면 민초들의 축성시 고초와 정묘호란 때 삶과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피가 말랐겠는가? 나는 남한산성에만 오면 그 당시의 처연함이 느껴져온다.  수어장대 곁에는 슬픈 사연의 청량당도 있다. 모든 것들이 마음 속의 생각을 깊게 한다. 수어장대에서는 사진을 조금 찍고 하산하였다. 다시 서문을 거쳐 서문 옹성 앞에 있는 전망대에서 서울과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서울 송파 일대는 마많은 변화가 있었다. 송파 위례 신도시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롯데월드타워도 랜드마크가 되어 바라보인다. 구룡산, 대모산, 청계산,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등 서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가 조망되는 곳이다. 


그리고 경치좋은 전망대를 뒤로하고 서문으로 성내로 다시 들어와 이번에는  국청사(國淸寺)를 거쳐 하산하였다. 절 경내로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아기자기 한다. 옛날 승병들과 여러가지 전쟁 대비한 물자를 비축한 곳으로 짐작된다. 국청사를 거쳐 이번에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우거처 나온다. 옛날 낡은 모습을 한옥으로 깨끗하게 수리하였다. 나는 우리나라 개신교 종교인 중에서 이분을 제일 존경한다. 사리사욕이 없고 마지막에도 통장 하나 없이 목회를 떠나 이곳에서 지내시다 타계한 분이시다. 청렴결백의 상징이다. 이런 목사들이 많이 나와야 우리나라가 발전할 것이다. 교회를 자기 사유물로 착각하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실태를 생각해 보면 머리가 아파온다. 종교 분애에서도 이러한데 타 분야에서는 오즉 하겠는가?  이 길을 내려오니 주변에 밭이 나오고 집들이 있는데 농촌같은 분위기 느껴진다. 밭에는 각종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동서가 이런 광경을 보고 좋아한다. 나도 이런 텃밭과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이 좋다. 이런 광경은 너무 나의 옛 기억을 되살려 아득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야한다. 하남으로 가볼까 하는데, 우리 처제가 주차장 곁에 좋은 곳을 보았다고 한다. 산채정식을 하는 음식점인데 평소에 이곳에 오면 좋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는데 참 잘 됐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처제가 눈이 좋고 센스티브하다. 향토음식 아라리오 (031-749-6200/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017) 에서 산채정식 (13,000원)을 맛있게 먹었다. 카페 분위기의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진 이 음식점의 음식맛이 아주 좋았다. 나오는 음식 가지수가 무척 많고 향토음식을 먹으니 몸에도 좋으며 너무 우리에게 잘 맞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보통 닭,오리,보신탕 요리를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산채정식을 메뉴로 구성했다는 것이 너무 반가웠다. 오후 2:15분걍에 이 음식점에 들렀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주차장 곁에 있어 편리하기도 하였다. 음식점도 크고 무엇보다 인테리어등 분위기도 좋고, 커피도 판매하는데 경치 좋은 시원한 테이블에 앉아 먹을 수 있다.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행복한 우리들은 다리가 아파 힘든 집사람은 이 음식점에서 쉬도록 하고 남한산성 행궁  구경하려 가보았다. 이곳 행궁은 규모와 형식이 작은 경복궁을 보는 듯 하다. 행궁의 정문 한남문(漢南門)이 높게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문장 옷차림을 한 사람도 보인다. 다행히 매표 (성인 2,000원)을 하고 들어가니 해설자가 행궁에 대해 해설을 하고 있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평소 나는 이곳에 오면 사진이나 찌고 돌아나갔는데 여기에서 해설을 들으니 너무 좋았다. 특히 우리 처제가 학구파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다. 해설을 들으며 주화파, 척화파의 논쟁과 그들의 삶을 들어보는데 가슴이 뭉클해 짐을 느꼈다. 국란이 슬프고, 몸부림치며 처절하게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저항한 신하, 학사들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었다. 해설자의 탁월한 설명이 너무 좋았다. 내용을 알고보니 이곳 남한산성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국란의 처절한 현장에 있는 나는 시대를 뛰어넘어 어떤 감동과 함께 옷깃을 여며야 하는 곳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참으로 우리나라가 이렇게 역사의 질곡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발전하였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남한산성 행궁한남문, 통일신라건물지, 외삼문, 중문, 외행전, 내삼문, 내행전, 좌승당, 명위문, 이의정, 좌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요소요소에서 해설이 이루어졌다. 해설자의 정성어린 해설에 감명을 받았다. 오늘 나는 남한산성 방문에서 이 행궁의 관람과 해설이 백미라고 느낀다. 수어장대와 행궁을 보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고 느꼈다. 우리 처제와 동서도 좋아한다. 우리 처제는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일고 너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한번 읽어볼 생각이다.              


오늘의 남한산성 구경은 너무 보람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을 돌아보며 역사 공부를 많하였다. 해설자의 이야기로는 평소애는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오늘은 더위 때문인지 사람이 조금 덜하다고 한다. 역사적인 장소인 남산성을 둘러 보면서 남한산성이란 어떤 곳인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남한산서의 성돌 하나에도 역사가 숨 쉰다는 느낌을 갖는다.  남한산성은 역사의 숨결도 느길 수 있고. 와의 거처인 행궁도 보고, 아름다운 성곽도 보고, 소나무 숲과 더불어 산책이 즐겁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고, 맛잇는 먹거리가 풍성한 그런 곳이다. 그리고 남한산과 벌봉과 청량산을 두고 깊고 깊은 계곡미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성남 방향의 지하문(남문)을 통과하여 좌익문(동문) 광주방향으로 내려 가거나 올라오는 드라이브는 너무 멋있다. 길고 긴 계곡미를 느낄 수 있다. 남한산성 너무 멋진 곳이다.  주차요금도 하루종일 1,000원이다. 주차장을 옮겨다녀도 된다.     




남한산성 산책:

남한산성 종로 로터리 근처 주차장....11:20분경인데 차들이 만차 상태이다. 차량 한대가 나가면 한대를 대는 식의 상태이다..기다리는 자는 복이 잇는 자이다. 다른 때 같으면 이 시간에는 주차는 어림없는 일이다. 너무 다행이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도착하는 것이 능사다.  주차요금 하루종일 1,000원...


남한산성 행궁 관람 매표소...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세계유산 남한산성...World Heritage Namhansanseong....


북문으로 가는 길목....북문지역>:  국청사, 유진사댁 잔찻날, 용마루, 석촌, 돌 집, 카페 남한산성, 청수가, 숲속으로, 반월정, 백제장, 한경직목사 우거지, 계곡산장, 영락수녀원, 먹거리창고, 백송, 산성커피, 송림정, 동촌, 청와대 한옥팬션, 석산정   


북문 입구 이정표....  <- 지화문(남문) 2.9km, <- 전승문(북문) 0.1km, -> 지화문(남문) 0.9km, -> 졸로 0.3km.  ↖ 숭렬전 0.5km.


북문 지나 산책로...평지 같은 좋은 길이다...


<- 0.5km 전승문(북문), -> 학암동 1.9km, -> 수어장대 1.1km, -> 우익문 (서문) 0.5km...


남한산성의 수림....산성 안의 산 능선 마다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점이 너무 좋다...

 


수어장대:


수어장대...


무망루....옆의 이승만대통령 기면식수 비석...



무망루....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남한산성 곡선형 성곽 외부....비교할 수 없이 너무 아름답다....


병암남성신수비....서문 가는 길에서 넓은 길 옆의 숲길로 가다 오늘 처음으로 이 신수비를 만난다.  


병암남성신수비( 屛岩南城新修碑) 는 선조들의 건축실명제를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정조 3년(1779) 6월 18일까지약 50여일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웅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비문에는 산성을 증.개축하는데 돈 1만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다는 것과,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자와 보수 영역을 18구역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두개의 돌로 되어있고 '병암'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서문 전망대:

서문(우익문)...


전망대 가는 성곽 길...


활짝 웃는 야생화...


서문 전망대...서울의 경치를 바라  볼 수 있다.


성남 복정동 방향... 성남(城南)이란 지명은 한한산성 남쪽에 있는 고을이라하여 붙여졌다 한다.


마천동 방향...송파, 강남 방향.... 공터는 특전사가 이전한 터이다...


송파, 강동, 아차산 방향...


남한산성 거여,마천동 방향 능선...주로 등하산시 많이 이용한다.  


공사중 통제안내....남한산성은 촘촘히 정교하게 축성한 모습이 언제보아도 좋다...


우익문(서문)...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였다.


서문은 인조가 항복하러 나온 문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병자년 1636.12.14 열흘여 만에 압록강을 건너 한성까지 파죽지세로 달려온 청 나라 기마부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남한산성 안에서 불쌍한 백성들은 청군에게 포위 당한채 고립과 추위에 떨었다. 이런 고난의 시간에서 항복하기 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론자 최명길과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며 청과의 결전을 주장한 척화론자 김상헌이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이듬해 1.30 치욕의 항복을 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이미 9 년 전 정묘호란을 겪어놓고도 갑자기 맞이한 청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 이후 50만 명이 넘는 백성이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통을 겪었다. 이런 치욕은 두번 다시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남한산성에 올 때마다 사람은 어떤 치욕을 겪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도 못하겠는가? 내가 살고 처자식을 구하는 일이다.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처자식을 버릴 수 없다. 그 부모를 배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다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남한산성에 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많이한다.



우리 집 사람 왈...꽃 이름은?  즉석 작명...성꽃(?)...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우익문, -> 감이동 1.9km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읍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의 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이라는 이름을 가고 있읍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문을 통과하며...


국청사:

정겨운 텃밭...상추며, 파며 등등이 심겨져 있고 푸르게 자라고 있다..이런 광경을 보면 너무 좋다.. 우리 동서도 좋아한다.


국청사 옆 길...



국청사(國淸寺)... 나라를 맑게하는 절...이름이 좋다...



국청사 대웅전.....


국청사인조2년(1624) 남한산성 축성시에 창건된 7개 사찰 중 하나로 당시 성내에는 망월사옥정사가 있었는데, 1624년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성의 전담케 하였기 때문에 7개 사찰을 창건하여 모두 9개 사찰에서 승군의 숙식, 훈련 및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무기와 화약, 군량미 등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국청사는 그 후 을사조약때 의병의 군기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군에 의해 방화 소실된 것을 근래에 중건하였다. 사찰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및 종무소, 요사체가 있다. 절터는 작은 능선 사이에 완만하고 넓은 대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주변에 기와 파편등이 많이 보이고 있으며, 1996.7.24 광주군수가 세운 표석이 있다.



삼성각..


천불전...


숲이 좋다...자연이 아름답다...



한경직 목사 우거처:

한경직 목사 우거처...


우거처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북문 입구와 국청사 중간쯤에 산 속에 있다.  우거처 앞마당에는 예배실인 팔복재관리실 건물이 있다. 팔복재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八福)’을 의미한다는데, 한경직 목사의 삶과 정신을 느끼게 한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이 산 위에서 군중들을 향해 8가지 복에 대하여 설파한 말씀이다. 기독교의 핵심 주 하나이다. 이 세상에 복있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 자일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복을 받게되는가? 여기에 그 해답이 있다. 마태복음 5장 안에 있는 예수님 말씀이다.   


한경직 목사님은 “나는 내게 속한 집 한 칸,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라며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 짓기 전 한목사님이 계실 때의 우거처에는 좁고 허름한 거실 겸 주방, 주방 작업대, 의자를 세 개만 놓여있었다 한다. 유리 덮개가 깨진 식기건조대도 버리지 않고 쓰셨으며, 아침부터 성경을 읽다가 어린이부터 나이든 성도까지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고 한다. 먼지 자욱한 천소파 7개와 모서리가 닳은 문갑, 책장, 탁자는 그의 청빈한 삶을 짐작케 했다. 손자와 손녀의 모습이 담긴 액자와 영락교회 50년사를 담은 책자,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보고서, ‘타임’지 등이 1929년 미국 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예장 통합의 기반을 닦은 그의 삶을 말해 준다고 한다. 침실에는 낮고 좁은 싱글 침대와 이불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며, 침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불장에는 태극기와 애국가, ‘쓰레기를 줄입시다’는 표어가 붙어있었고, 매일 아침 일어나 태극기를 보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청빈한 소박한 삶이 내 마음을 감동 시키다.내가 가장 존경하는 종교인이다.  한경직 목사, 청빈한 삶의 대명사. 시대를 뛰어넘는 진실한 종교인의 표상이다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영일없이 바쁘게 살고, 청빈한 삶을 살다간 영원한 스승이다. 우리의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지금의 종교인들을 보면 종교를 사유화하고, 일신의 가족 승계에다, 대형호화 찬란하게 하며, 겉으로만 성스러운척 하며, 종교 권력을 틀어쥐고 말 못할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려운 시대에 종교의 사명을 잊은 채 조용히 몸 보신만 한다. 이러한 시대에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 더욱 볓처럼 돋보이게 된다.


한경직 목사 (1903-2000):  평남 간리 출생.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평안남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미국 미국 엠포리아대학교(College of Emporia) 졸업,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미국 엠포리아 대학교 대학원 졸업 (신학박사).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민족에 눈을 떴다. 1945년 월남해 영락교회와 영락모자원, 영락노인복지센터, 영락보린원 등을 세우며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아낌없이 도왔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그는 청빈하고 겸손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칭송받고 있다. 1남1녀의 자손을 두었다. 저서: <창조적 생활의 비결>, <팔복>, <내일을 사는 인생>, <예수를 바라보자>, <사도 바울에게 배운다>, <열매맺는 신앙생활>, <나의 인생 길의 아름다운 명상>, <병상에서의 묵상>, <신랑 신부에게>, <나의 감사>

<경직 구술 자서전> 등등 다수.



푸른 녹음의 숲을 보면 왠지 마음이 감동한다. 너무 좋다. 이 나이에 느끼는 감정이다. 나이 먹으니 모든 산천초목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진다.


남한산성의 그림같은 집들...그리고 텃밭들....꿈속의 이상향 처럼 보인다...


영락수련원....


효자우물....아, 나는 이 효자우물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온다. 효도란 말만 들어도 감동한다. 


효자우물에 전하는 효자 정남 이야기...

남한산성 북문 안에는 효자우물 또는 효자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이 이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온다. 옛날 산성 북문 안에 정남이라는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다. 정남은 홀아버지와 단둘이서 가난하게 살고는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정남은 어린 나이였지만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병구완을 했다. 하지만 병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정남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끼니를 잇기 위한 벌이조차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정남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동냥을 하여 끼니를 마련하고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은 전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정남의 집 앞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진맥을 보게 되었다. 병들어 있는 아버지의 진맥을 보고 난 그 사람은 잉어를 고아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남은 무척 기뻐하며 그 길로 잉어를 구하러 나섰다. 정남은 스스로 잉어를 잡지 못하면, 어부를 만나 사정을 해서라도 잉어를 구하리라 마음을 먹고는 강가로 갔다. 하지만 그 때가 마침 겨울철이라 강물은 모두 꽁꽁 얼어 붙었고 잉어를 잡는 어부 역시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사정은 다음날도 마찬가지였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정남은 낙심했지만 그렇다고 잉어를 구하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남은 하루 종일 잉어를 구하러 다니다가 피곤한 몸으로 어느 산기슭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정남은 우물 앞에 힘없이 주자앉아 아버지 병구완을 하려는 것이니 잉어 한 마리만 구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하늘에 간절한 기도를 한 후 눈을 뜬 정남의 눈에 잉어 한 마리가 보였다. 우물 속에서 금색 비늘이 빛나는 잉어가 한 마리 헤엄치고 있었다. 정남은 즉시 두 손으로 잉어를 잡아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잉어가 무척이나 크고 무거워서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잉어를 건져 올린 정남은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하늘에서 보내준 것이라고는 생각하고는,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엎드려 감사를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정남은 잉어를 솥에 넣고 정성스럽게 고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께 정성껏 고은 잉어국을 대접했다. 잉어국을 맛있게 먹은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

마을에서는 정남이 어렵게 우물에서 구해온 잉어를 먹고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남의 효성이 지극해서 하늘에서 잉어를 내려주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정남이 잉어를 잡았던 우물 역시 보통 우물이 아니라 효자를 알아보는 우물이라고 해서 효자 우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으며, 부모를 따르지 않으면 자식 노릇을 할 수 없다.

不得乎親(부득호친),不可以爲人(불가이위인), 不順乎親(불순효친),不可以爲子(불가이위자).   - < 맹자, ' 이루 상 제28장' > 



<- 1.4km 수어장대, <- 0.8km 우익문(서문), -> 종로 0.5km... 


석촌...031-749-9338...남한산성에는 음식점들의 천국이다..


먹거리창고 031-744-2594...


돌집, 031-742-8960...


백송 031-747- 5584..


코너를 돌아 종로 로터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내려온 길...북문 방향을 뒤돌아본다....



종로로터리.... <- 500m,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아라리오 점심:

아라리오 (031-749-6200/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017) ...아라리오 산채정식 13,000원...


산채정식(1인) 13,000원, 엄나무백숙, 닭볶음탕, 오리주물럭, 한방오리백숙, 산채비빔밥 8,000, 순두부찌게 6,000, 소고기국밥 8,000, 해물파전 12,000, 도토리묵 12,000, 더덕구이 20,000.


수국이 많았다. 너무 색색의 아름다운 꽃이다...


시원한 탁자...


음식점 실내...



산채정식 13,000원 정말 먹을 만 했다. 건강에도 좋고, 맛도 졿고, 반찬 종류도 다양하고, 값도 착하다...




남한산성 행궁:

행궁 가는 길..인화관....


인화관 뒤뜰...그리고 산성마을....벌봉 방향....


남한산성 행궁... 엇, 사또 나리가...




한남루...행궁의 정문이다..


남한산성 행궁 (사적480호)...


행궁(行宮)이란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



관람안내....해설 시간을 맞추어 꼭 해설을 듣로 하자. 오늘 참 해설을 들으니 유익했읍니다.


관람시간: 하절기(4월-10월) 10:00-18:00, 절기(11월-3월) 10:00-17:00

관람요금: 개인>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단체>  어른 1,600원, 청소년 8,00원


해설안내:

1회 주말.공휴일 10:00
2회 평일 11:00, 주말.공휴일 11:00
3회 주말.공휴일 11:00
4회 평일 13:00,
5회 평일 14:00, 주말.공휴일 14:00
6회 주말.공휴일 15:00
7회 평일 16:00, 주말.공휴일 16:00



외삼문...행궁 안으로 들어선다...


한남루를 행궁 안에서 바라보다..


남행각 중문 사이 뜨락.. 남한산성 주요 부분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수어장대현절사가 눈에 띄인다. 


수어장대 사진...일제강점기...


현절사 사진...1950년대...


현절사....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재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부속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어 조선 선비의 정신을 말해 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외행전....왕의 집무실이다..


외행전 오른쪽의 좌승당, 일장각 건물...그리고 가건물 같은 통일신라 건물지...


신하들이 도열하는 통로...좌측에 문신, 우측에 무신이 선다...조선시대는 9품계가 정,종으로 구분되어 있어 품계석이 세워져 있고 도열하게 되어있으나 여기는 장소가 협소하여 품게석은 없다.


동남 방향...


외행전 앞..


좌측의 지붕이 있는 곳 아래로 내려가면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나온다.


통일신라 건물지...


발굴 모습 사진...통일신라 건물지는 길이 53.5m, 폭 17.5m로 지금까지 발견된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 중 최대이다. 


좌승당...좌승당은 광주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순조 17년(1817) 광주유수 심상규가 건립하였다. 좌승당이란 이길만한 계책이 있으면 적을 앉아서도 물리칠 수 있는 의미이다.


명위문...


이위정에서 명위문 방향 ...오른쪽은 재덕당내행전이다....


이위정에서 바라보는 좌전 (영녕전, 정전) ...종묘사직의 위패를 모시는 곳...


이위정....


이위정 내부의 탁본 편액 '이위정기'...추사 김정희 글씨다.


재덕당...내행전 뒤편에 있다...


내행전에서 외행전 방향...


내행전...


내행전 내부...일월오악도 병품이 둘러있다. 병풍은 평소에는 접어두었다가 임금이 주석할 때만 펴서 세운다. 혹시 자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서란다. 그러고 보니 궁궐이나 행궁에서 문을 3개 통과 해야만 임금의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 아닌가 한다.

중국 황제의 경우 5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단다. 


나가는 길..외행전 ......


나는 오늘 역사의 길을 걸었고, 역사의 성곽을 보았고, 산 위에서는 서울의 발전된 모습을 보았다. 역사는 부단히 흘러간다. 어떻게 하든 나라가 부강해져야만 한다. 나라가 망하고 없어지면 개인의 삶도 없어진다. 우리 나라 주변의 정세에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럴려면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 국방이 튼튼해야 한다. 외세를 믿으면 안된다. 역사적으로 적의 관계가 있었던 나라들은 조심하여야 한다. 모든 나라와 선린 관계를 맺어 경제를 활성화 시키고 잘 살아야 하지만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